후마니타스칼리지-대학주보 공동기획: 고전의 사계36
지식은 양날의 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세상에서 으뜸가는 지혜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자가 있었다. 그 자는 젊고 똑똑했으며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는 정의로움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칭송하고 따르면서 왕으로 추대했고 여러 해 전 비명횡사한 선왕의 미망인도 슬픔을 거두고 흔쾌히 청혼을 받아들였다. 왕은 나라를 보호하고 명예롭게 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으며 왕비와의 금술도 좋아서 슬하에 여러 자식들을 두었다. 그러나 행복한 시절도 잠시일 뿐, 다시 나라에 재앙이 찾아와 사람들의 원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앙의 원인으로 지목된 선왕 살해자를 찾기 위해 온갖 수사력과 강제력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던 그 때,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왕국을 찾아온 한 노인이 있었다. 앞 못 보는 백발의 이 장님은 왕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지혜가 아무 쓸모없는 곳에서 지혜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품 《오이디푸스 왕》의 시작부분이다. 이 작품을 쓴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3대 비극작가로 꼽힌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가는 작품들은 자신이 속한 시대와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 통찰력과 함께 읽는 사람만의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특징을 갖는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이런 고전작품의 대표적인 사례로 2,500여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철학자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며, 새로운 변주의 모태가 돼왔다.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97년경에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테네는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그리스 연합국들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경제적 풍요로움과 더불어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꽃피던 시절이었고, 국가생활의 표현으로 예술을 위한 각종 축제가 펼쳐졌던 때였다. 소포클레스는 아테네가 몰락으로 돌아서서 결국에는 패망하는 전환기에 작품 활동을 펼쳤다. 소포클레스는 아테네의 위기가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확장하기 위해 주변 동맹국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면서 자초한 야심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인간의 지식과 권력이 타락을 겪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다.
소포클레스는 지식과 권력의 위험성을 이렇게 경고한다. “오만은 폭군을 낳는 법, 오만은 시의(時宜)를 얻지도 못하고, 유익하지도 않은 부(富)로 헛되이 자신을 가득 채우고는 꼭대기로 기어올라갔다가 가파른 파멸 속으로 굴러떨어지니, 거기서는 두 발도 무용지물이리라.” 선왕이 자신의 아버지이며 왕비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 찾고 있는 살해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오이디푸스는 바로 눈앞의 것만을 보느라 정작 자기 자신이나 더 먼 곳을 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아는 것에만 안주하는 태도와, 이익이나 출세를 위한 것으로만 사용되는 지식은 언제든지 자신을 향한 칼날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위대함은 이성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데 있다. 델포이 신전의 문설주 위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아폴론 신의 계명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소포클레스는 이 계명을 인간의 오만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였고, 동시대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 계명을 갖고 아테네 사람들의 등에를 자처하면서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대화의 철학을 펼쳤다. 그리스의 문학과 철학은 이러한 자기반성과 겸허함 속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보았던 것이다.
이은정,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5월31일자 대학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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