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왜 있는가? -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 후마니타스 칼리지 - 대학주보 공동기획. 고전의 사계 23


누님, 예술 한번 하시죠?”

20여 년 전, <왕룽 일가>라는 드라마의 대사로 세간에 큰 히트를 쳤던 유행어다. 지금은 모두가 인정하는 실력파 배우지만 당시로서는 무명에 가까웠던 연극배우 최주봉 씨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명대사다. 춤 한번 추러 가자는 뜻의 쿠웨이트 박(최주봉)의 그 대사에 드라마 속 변두리 동네 아주머니들은 열광한다. 새삼스레 지나간 드라마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예술’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쿠웨이트 박의 입에서 나오는 예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저급한 취향과 촌스러움에서 오는 코미디를 볼 수도 있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고급 예술의 허구성을 전복하는 대중 예술의 첨병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쿠웨이트 박을 보면서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반대로 쿠웨이트 박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예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의 차이에서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번쯤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주의를 요하는 물음이다. 예술 작품들은 자연의 정수(실재)를 재현하는 것들도 있고, 예술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들도 있고, 우리에게 감동이나 놀라움, 심지어 충격을 주는 것들도 있다. 예컨대 루벤스가 그린 어린 아들의 귀여운 얼굴은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주제였음에 틀림없다.

한편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고생에 찌든 늙은 어머니의 얼굴은 결코 아름답지는 않지만 위대한 진실을 담고 있는 명작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 다른 예술 작품들과 갖는 여러 공통점을 찾을 수는 있지만, 모든 예술 작품들이 공유하는 어떤 속성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헛수고다.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로 말해서 ‘예술’은 가족유사성 개념이다. 즉, 예술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고정 불변의 대상, 이른바 본질적인 의미란 없다. 에른스트 곰브리치(E. H. Gombrich, 1909~2001) 역시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에서 고유명사로서의 미술이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시대와 사회적 배경에 따라 서로 다른 여러 예술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물음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왜 그 예술가는 그러한 작품을 만들었는가?”

예술과 예술가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최고 수준이다. 선사 시대 동굴 벽화부터 현대의 실험적 예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들에 관한 저자의 풍부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숙한 솜씨로 밖에 보이지 않는 중세시대 그림의 인물 묘사나 현대의 추상 표현주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색이나 형태의 의도적인 왜곡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곰브리치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가 다른 행성에서 지구를 처음 찾아온 우주 여행객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지구의 사물들에서 엄청나게 놀라운 다른 색채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화가들은 세상을 새롭게 보고 사과는 빨갛다는 기존의 관념과 편견을 버리고자 애쓴다. 그리고 이것에 성공하게 되면 미술가들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화가들은 우리들에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움의 존재를 자연에서 찾으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그들을 따라 그들로부터 배우고 우리 자신의 창틀에서 벗어나 그들의 세계를 한번 힐끗 내다보기라도 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감동적인 모험이 될 것이다.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들 자신, 즉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 있다".


김명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2013년 12월 9일자 대학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