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의 산책자: 발터 벤야민의『아케이드 프로젝트』
- 후마니타스 칼리지 - 대학주보 공동기획. 고전의 사계 28
학교-학원-집, 학교-학원-집.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의 일상이다. 대학에 들어와도 똑같은 패턴의 삶이 반복된다. 단지 목표가 수능에서 취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취업에 성공해 회사를 다니면 삶이 달라질까? 회사-집, 회사-집. 역시 마찬가지의 단조로운 삶이 반복된다.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일상은 사람들을 권태로 이끈다. 권태에 찌든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유일한 일탈은 새로운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아이돌에게 환호하고, 나이가 들면 값비싼 명품을 쫓으면서 권태로운 일상을 잊으려 한다.
핑클과 소녀시대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난 십 수 년간 수많은 아이돌 스타들이 등장하고 사라졌지만 실상은 ‘반복되는 새로움’일 뿐이다. 루이뷔통과 샤넬이 매년 발표하는 신제품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상품들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포장만 바꾼 것이며 사람들은 반복을 새로움으로 착각한다. 우리는 늘 새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항상 같은 것에 열광한다.
처음에는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품을 소비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품을 소비하기 위해 권태로운 일상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높은 연봉을 원하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소비가 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생들은 고된 취업 준비에 뛰어든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가 제시하는 삶의 패턴에 자신을 종속시킨다. 스스로 욕망하는 법은 잊어버리고, 무언가를 생산하고 저항하는 욕망 대신에 자본이 제시하는 소비의 욕망만을 욕망하게 된다.
벤야민은 자본주의 사회의 산책자를 자처하며 자본이 제시하는 환상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간다
문제는 우리를 얽어매고 부추기는 자본의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천송이 립스틱을 바르면 천송이처럼 보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우리는 상품들의 속삭임을 거부하지 못한다. 자본이 뿌려대는 이미지의 환상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기 위해 더 치열하게 시시포스의 노동을 반복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니던 학교, 회사를 때려치우고 산 속에 들어가 홀로 살거나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회 전복을 부르짖는 혁명 투사로 변신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같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지난 세기 수많은 사람들이 실험해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자본주의는 오히려 더 팽창하고 더 강해졌다.
독일의 사상가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또 다른 방법을 제안한다. 자본주의의 환상을 내부로부터 해체하고 그 조각들을 재구성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벤야민은 자본주의 사회의 산책자를 자처한다. 산책자는 환상의 외부에서 환상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자본이 제시하는 환상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들처럼 환상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도 아니다. 환상의 파노라마를 구성하는 이미지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각각의 이미지들을 새롭게 연결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마치 에이젠슈타인의 영화처럼 이미지들을 몽타주해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목적이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벤야민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완결되지 못했고 방대한 자료들과 미완성의 원고만 남았다. 그렇지만 그가 제시한 방법은 후기 푸코와 아감벤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서구 지성계의 ‘벤야민 르네상스’를 가져온 주요한 요인이었다.
고 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4년 3월 17일자 대학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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