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에세이] 같은 장면이 다른 음악을 만났을 때


영화감독 박찬욱의 최근 인터뷰를 소개하면서 '미니멀리즘' 강의를 시작해 보았다. 학생들의 흥미를 이끌기 위한 일종의 유인구였던 셈이다. 박찬욱의 한 영화엔 소녀와 청년이 피아노에 함께 앉아 4손을 위한 연탄곡을 연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감독은 이를 영화의 핵심적 장면으로 꼽았다. 애초 시나리오 원안에는 이 화면의 음악을 '에릭 사티풍으로'라 지시하고 있었다.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소녀와 청년의 연주에 전혀 다른 긴장을 원했던 것. 하여 감독은 지문을 뜯어 고친다. '필립 글래스 풍으로'

시나리오 작가가 의도했던 사티의 음악이 정확히 어떤 곡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너를 원한다'는 노골적 제목의 피아노곡 'Je te veux'를 선곡해 보았다. 영화 속 남자도 소녀를 간절히 욕망했던 터였다. 사티의 곡을 임의로 입힌 장면과 영화에 실제로 삽입된 글래스 음악의 장면을 수업에 앉은 학생들에게 연거푸 보여 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음악은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달리' 암시하고 있는가?

사티는 20세기 초 활동했던 프랑스의 작곡가로 후대 예술사조의 부조리극과 미니멀리즘에 뚜렷한 영향을 드리웠다. 그는 장식보다는 단순함의 추종자였다. 간결한 선율선과 투명한 화성은 존재감을 애써 드러내는 대신 배경에 겸허히 스며든다. 사티의 선율에 편안히 젖어들다 보면, 감정의 더께로부터 무심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 제자리에서 맴돌듯 들리는 이 완만한 맥박의 음악은 일상의 온갖 강압적 속도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당의를 입힌 알약과 같이 작용하곤 한다. 혹자는 이를 몽환적 최면성이라 일컫는다. 사티의 'Je te veux'를 입힌 듀오연주 장면을 감상하자, 학생들은 두 남녀의 관계를 '아늑하며, 부드럽고, 달콤한' 설정으로 이해했다.

완성된 영화에 입혀진 글래스 음악의 장면을 뒤이어 감상했다. 적은 재료를 반복해 점진적 변형을 꾀하는 글래스의 전형적 문법에 비하면 이 장면의 음악은 영화에 최적화되어 남녀간 보이지 않는 갈등을 다층적으로 암시한다. 학생들에게 인상을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음악이 차가워요. 물결 같은 음들이 계속 반복됩니다. 사티가 달콤한 꿈이라면 글래스는 악몽 같아요."

글래스는 1960년대 태동한 미국의 미니멀리즘을 선두에서 이끌며 대중적 성공까지 움켜쥔 작곡가였다. 영화음악에 미니멀리즘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도 이 사람 덕택이었는데, 그는 복잡한 화성을 배제한 채 간결히 압축된 선율과 리듬으로 반복과 변형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사티 역시 짧고 대칭적인 악구를 병치, 반복하는 기법을 편애했으니 글래스와는 공통의 접점을 갖는 셈이다. 그러나 사티의 음악이 단조롭고 평면적인 전개를 통해 일상의 벽지처럼 배경에 물러나는 효과를 자아낸다면, 글래스의 음악은 압축과 생략을 통해 보다 강력한 본질을 드러낸다는 점이 다르다. 최소한의 몸짓으로 최대의 효과를 의도하는 미니멀리즘의 철학은 글래스의 음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상컨대, 영화의 핵심적 장면을 두고 나뉘었던 양 갈래의 입장 차는 결국 음악을 배경으로 물러 놓느냐, 혹은 음악의 물성을 전면에 드러내느냐의 선택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사티의 음악이 남녀의 사랑을 더욱 효과적으로 그려냈다는 대답을 들려준 학생들에게 영화 속 남자의 정체를 밝혔다. 자못 놀라는 눈치였다. 반면, 앞뒤 맥락을 다 잘라 내고도 남녀의 교감을 악몽으로 이해한 학생들은 감독의 의도를 직감적으로 간파했다며 우쭐해 했다. 영화 속 소녀에게 연정을 품은 남자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었다. 소녀의 아버지를 살해한 삼촌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같은 장면이라도 혹은 같은 미니멀리즘적 절제의 음악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음악을 만나게 되면 달콤한 꿈과 악몽 사이의 간극을 넘나들 수 있다. 단, 이 절묘한 차이를 스스로 야기하거나 적극적으로 읽어내는 능력은 전적으로 예술적 감식안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조은아,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10월 19일자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