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박정희의 불행


독재는 매혹적이다. 정치사회적 혼란과 내전의 시기에 그러하다. 혹은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그런 시기라 판단하고 정치사회적 다양함을 혼란으로, 혼란을 내전으로 보면서 강력한 절대권력의 힘으로만 그것들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그렇다.

독재를 정당화하고 이론화하는 데 자신의 지력을 쏟아부었던 사상가들이 있었다. 저명한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로서 <독재론> 등의 책을 쓴 카를 슈미트가 대표적이다. 슈미트는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살인적 인플레이션과 실업 문제를 겪고 있는 위기임에도, 다원적 의회주의 정치를 기본 원리로 하면서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을 잠재적인 내전 상태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슈미트는 <공화국론>(1576)을 쓴 장 보댕과 <리바이어던>(1651)을 쓴 토마스 홉스가 자신의 사상적 원류라고 꼽았다.

보댕과 홉스 모두 혼란과 내전의 시기를 살았던 이들인 데다가, 독재를 정당화하는 근거를 국가이성론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공적 질서 그 자체이기에 법, 윤리, 종교 등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슈미트는 혼란스러운 현실의 타파를 명분으로 프로이센의 사회민주당 정부를 제거하기 위한 힌덴부르크 연방정부의 긴급조치를 옹호했고, 결국 히틀러 나치 정권을 지지했다. 단순히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철학과 신념에 바탕을 둬 그러했다. 아마도 이것이 그가 나치 시대의 황제법학자로까지 불렸던 진짜 이유이리라.

슈미트는 나치 패망 이후에도 자신의 처신에 대해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사과하지 않았다. 나치에 가담했던 것이 히틀러에 대한 ‘착각’ 때문이었다고 변명하기는 했다. 히틀러가 독일과 서양문명의 발전을 위한 독재자가 아니었는데 잘못 봤다는 것이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독재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더 큰 전쟁을 가져온 독재의 무서움을 목격해놓고도 그것의 필요성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은 듯하니 말이다.

지난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과 추모예배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한국에는 독재가 필요하다”, “간첩이 날뛰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유신 시대가 더 좋았다”는 발언들이 나왔다. 이 발언은 박정희 추종자들이 ‘박정희’를 기억하는 특정한 방식을 확인시켜준다. ‘독재의 유혹’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보댕도, 홉스도, 슈미트도 아니다. 그리 될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국가이성과 독재의 이유를 기껏해야 주변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돌쇠 정신과 억압적 반공주의에서 찾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부하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등진 박정희는 사후에도 불행한 게 아닌가 싶다. 자신을 추종한다면서 그저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과거의 것으로 고착시켜놓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추종자라면 미래를 열어젖히는 살아 숨쉬는 비전으로 재구성해내야 할 텐데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추종자들은 박정희라는 이름을 갖고 반목과 대립만 키우고 있다.

시민운동가 한 사람이 박정희 추종자들의 이번 발언을 듣고선, 어쩌다 유신이 좋았다는 식의 말을 공공연히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느냐며 개탄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로 그들 발언에 크게 마음 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들 몇몇이 대한민국을 다시금 독재의 시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독재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열정을 지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다. 민주화 이후의 대한민국의 다양함이 혼란으로, 혼란이 내전으로 이어질 성격의 것인지도 의문이다.

강자독식에 따른 힘의 불균형이 워낙 큰 데다가 대부분의 약자들이 유일한 재화인 조직 자원을 얻을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원자화된 개인으로 묵묵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박정희 추종자들이 독재 타령을 하는 이유는 둘 중 하나이리라. 낡은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낳은 망령이거나, 강자에게 대들지 말고 계속 얌전히 있으라는 협박이거나.


김윤철,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10월 30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