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


민주주의는 필요하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의 흠과 허물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뭔가 ‘불경한’ 주장으로 보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부자와 권력자의 흠과 허물을 단죄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민주주의의 목적이 부자와 권력자들의 흠과 허물을 단죄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 설사 단죄한다 해도 그 이유를 특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부자와 권력자가 아니라 오히려 부와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한 이들, 즉 민중을 우선 살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정당에 관한 이론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가 <절반의 인민주권>이라는 책에서 “인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만들어진 것이지,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라고 했던 이유도 민중을 우선하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다. 그가 말한 인민과 평범한 사람들이란 부와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한 다수의 보통 사람들, 즉 민중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 이후 아주 오랫동안 잊혀졌던 이름, 기억되었다 해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민주주의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들어 ‘좋은 것’으로 탈바꿈되어 인류 역사의 전면에 다시금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부자와 권력자의 흠과 허물을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민중을 우선 살피는 사상과 이념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을 목도하면서 민주주의는 이성을 갖추지 못한 무지하고 몽매한 다수의 전체주의라는 ‘전통적’ 견해에 바탕을 둬 ‘세상에서 가장 수치심을 모르는 것’이라고 힐난했다. 그러나 100년 후인 19세기 말을 지나면서 서구의 주요 정당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며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정당들은 지금도 자기 나라의 주요 정당으로 존재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창당돼 의석을 꾸준히 늘려 결국 원내 다수당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독일의 사회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이 민주주의를 내세웠던 것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정치·사회적으로 억압과 차별을 받던 -자신들의 지지자가 될 것이라 여겨졌던- 이들에게도 시민의 자격과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민중우선’의 사상과 이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 민주주의가 필요했던 이유는 시민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참정권의 확장 혹은 보통선거권의 도입을 위해서였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지녔다고 선언했던 근대 시민혁명에도 불구하고, 참정권이 주로 재산보유자에게만 한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또 참정권을 획득해 행사할 때 비로소 민중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를 의회에 보내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었고, 그것을 가로막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전횡을 제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 가운데 강자독식이 판을 치는 한국 사회를 떠올릴 때, 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 역시 다른 무엇보다도 민중 우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참정권이 주어진 상황에서 민중 우선의 내용은 민중이 ‘평등한 시민’으로서 자유롭게 저마다의 꿈을 쫓으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단죄해야 할 부자와 권력자의 흠과 허물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를 빼앗고 독점함으로써 공화적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생각과 행태일 것이다.

최근 시민운동가들 사이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촛불시위에 시민들의 참여가 저조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촛불시위가 내건 민주주의가 민중을 우선하는 민주주의인지 살펴보는 것이리라. 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를 다시 짚어봐야 한다.


김윤철,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8월 28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