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세상] ‘집밥’과 소화불량


‘집밥’이라니? 집과 밥, 낯익은 단어의 결합인데도 낯설었다. 이어 ‘독거연예인’이라는 말이 나왔다. 역시 처음 접하는 복합명사였다. 지난 일요일 오후, 오랜만에 처가 식구들과 어울린 자리. 거실 한가운데 켜져 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지켜보다가 혼자 새삼스러웠다. 씨름선수 출신 연예인이 식탁에 남은 음식을 비벼 입안 가득 집어넣자, 화면에 ‘폭풍 흡입’이란 자막이 나왔다

하루가 다르게 튀어나오는 신조어 현상을 짚으려는 것이 아니다. 집밥. 지난 학기 학생들의 글에서 집밥이란 표현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무심코 지나쳤다. 그런데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마주치게 되자 그 의미가 사뭇 달랐다. 내게는 생소하기만 한 저 복합명사가 사회적 인증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집밥’이란 자막과 마주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집과 밥이 분리됐다.

새천년 초입까지만 해도 서울 광화문 일대에는 골목이 제법 남아 있었다. 피맛골, 무교동 말고도 사방이 골목이었다. 골목 곳곳에는 오래된 음식점들이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그중에 ‘가정식 백반’이라고 써 붙인 밥집이 있어 자주 찾곤 했다. 기본 반찬에 김, 생선구이, 계란 프라이가 곁들여졌다. 봄에는 냉이국, 여름에는 미역냉국이 나왔다. 밥은 늘 고봉밥이었다.

집밥이란 낯선 단어 앞에서 왜 밖에서 사먹는 밥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고향집 밥상은 한참 뒤에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엄마 밥상’보다,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보다, 음식점 식탁이 훨씬 많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하루 한 끼 이상을 밖에서 해결했다. 집밥에서 밥집으로. 성년식은 집밥과 밥집 사이에 있었다. 밥집을 전전하다가 다시 집밥을 먹게 되는 것이 결혼이었다.

이른바 고도성장 시기까지만 해도 밥은 다채로웠다. 더운 밥, 맨밥, 주먹밥, 보리밥, 감자밥, 새벽밥, 눈칫밥. 상태와 재료, 시간, 상황에 따라 밥은 그야말로 다종다양했다. 그런데 집밥에 이르러, 밥의 위치가 난감해졌다. 집밥이란 신조어는 밥과 집의 급격한 변화를 그대로 담고 있다. 집밥에는 최소 두 가지 뜻이 있다. 집에서 먹는 밥, 집에서 손수 지어먹는 밥. 하지만 ‘독거연예인’이란 말이 환기하듯이, 1인 가구가 400만에 육박하면서 집밥이 희귀해지고 있다. 1인가구는 혼자 먹는다. 젊은이는 밖에서 ‘컵밥’을, 노인은 집에서 눈물 젖은 밥을.

집밥이란 신조어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고봉밥, 눈칫밥, 한솥밥처럼 곧 사라질 것이다. 컵밥의 등장과 함께 1인 가구, 초고령 사회가 ‘폭풍 도래’하는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다시 밥이다. 무엇이 밥을 규정하는가라고 몇 번 캐물어가다 보면, 민주주의와 직면한다. 정치(권)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민주주의, 정치는 없고 정치인만 있는 민주주의, 국민이 유권자일 때만 출현하는 민주주의, 그리하여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허약하게 만들고, 밥상을 추레하게 만드는 공범이 양극화다.

그런데 양극화의 성격이 변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뻔뻔한 1%와 무기력한 99%로 변신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에는 긴장이라도 있었다. 반목과 질시, 혹은 부끄러움과 부러움. 하지만 뻔뻔함과 무기력 사이에는 나쁜 상승작용만 있다. 뻔뻔함은 더 뻔뻔해지고, 무기력은 뻔뻔함 앞에서 더 무기력해진다. 나는 ‘혼자 먹는 밥’이 무기력증을 악화시킨다고 본다. 밥을 혼자 먹는 사람이 늘어나는 한, 혼자 먹는 밥의 부당함을 공유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를 심화, 확대하는 첫걸음이 밥과 정치를 재정의하는 것이다.

밥이 돈이고, 정치이고, 인격이다. 비유가 아니다. 밥벌이가 없으면 밥이 나오지 않는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래서 경제가 인간을 배제하고 기업 위주로 돌아가면 밥벌이가 생기지 않는다. 밥상이 초라해지면 삶과 사회가 비루해진다. 미국의 시인이자 농부인 웬델 베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사람들의 경제를 통제할 수 있다면 정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되묻는다. “기업 경제에 의존하지 않고는 누구도 부유해질 수 없다면, 우리의 투표가 무슨 소용인가?”

밥이 유턴 지점이다. 매 끼니마다 밥을 응시하며 질문해야 한다. 이 밥이 어디서 왔는가. 누가, 무엇이 우리 밥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그래서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소화불량에 시달려야 한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


이문재,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9월 6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