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세상] ‘꾸러미’ 오는 날


참두릅, 쌈채소, 오이, 제철 산나물, 흑토마토, 잔멸치, 혼합 6곡. 내일쯤 배달되는 ‘꾸러미’ 내용물이다. 이번 달로 세 번째. 전남 강진 대월마을에서 보내는 먹을거리다. 지난 3월 처음 도착한 택배 상자에는 현미찹쌀, 야생 쑥과 머우, 갓김치 외에 감태김치가 들어 있었다. 웬만한 지역 음식은 다 맛본 편인데 감태김치 앞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검색을 해보았더니 갯벌에서 자라는 해조류였다. 파래와 메생이 중간쯤. 양념이라곤 풋고추를 썰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뒷맛이 향긋했다. 소금으로 양치를 하고 난 뒤의 개운함이랄까.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향토 음식’은 낯설어도 아주 낯선 것이었다. 감태김치 앞에서 아이들은 코를 막고 손사래를 쳤다.

지난 2월 초 우연찮게 대월마을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는데, 그때 알았다. 마을에서 꾸러미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녹색세상’ 2월7일자 참조). 나는 두말없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지난 3월 하순 첫 꾸러미를 받았다. 대월마을은 내게 각별한 연고지다. 조부와 부모가 피란살이를 한 마을이다. 1·4후퇴 때 고향 황해도를 등진 가족은 강진 성전으로 들어가 7년간 농사를 지었다. 매달 집에서 받아드는 먹을거리는 반세기 전, 아버지가 일구던 바로 그 땅, 그 바다에서 나온 농수산물이었다.

음식은 역사와 문화의 총합이라는 말이 내게는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다. 꾸러미는 살아 있는 이야기다. 나는 꾸러미에서 가족사의 한 대목을 꺼내고, 강진 땅의 풍성한 이야기를 집어든다. 초의, 추사, 다산도 강진 땅과 인연이 깊다. 대월마을의 어르신들, 이장님 얼굴도 떠오른다. 자동이체를 이용하라는 권유가 있지만, 꾸러미 값을 굳이 은행에 가서 송금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은행에서 돈을 부칠 때마다 부모나 친지께 용돈을 부쳐드리는 기분이 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제 겨우 세 번째인데, 꾸러미가 기다려진다. 강진 땅과 단단히 엮였다.

꾸러미는 농촌의 생산자와 도시 소비자를 연결하는 소규모 직거래다. 대월마을 이전에 꾸러미 사업을 시작한 단체가 몇 있다. 꾸러미 사업은 자생적·자조적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새 정부가 소비자 참여형 직거래사업(꾸러미)을 활성화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정부의 농업 지원 방식이 바뀌는 신호탄인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미 지적이 나왔듯이, 정부의 지원이 또 하나의 거대 유통회사를 만드는 것이라면 쌍수를 들고 막아야 한다.

대월마을 꾸러미 사업을 이끌고 있는 가배울은 기업이 아니고 문화단체다. 가배울 대표 김정희씨는 “오래된 마을 하나가 박물관 하나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 김 대표의 발언에는 기왕의 경제논리로는 농촌을 살리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김 대표는 “딱 10~15년 남았다”고 말한다. 현재 60대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나면 농경공동체가 오랫동안 전수해온 지혜가 사라지고 만다. 이대로 가다가는 꾸러미가 미래세대를 위한 타임캡슐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도시는 농촌을 먹고 산다. 농촌이 죽으면 도시도 죽는다. 하지만 도시는 농업, 농촌, 농민을 여전히 무시하고 있다. 시골의 60대 할머니만 마지막이 아니다. 베이비부머 또한 마지막이다. 땅의 마지막 아들딸로 태어나 아스팔트 최초의 부모가 된 세대. 이들이 농경공동체를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세대다. 이들의 식탁에 감태김치와 샌드위치가 나란히 오른다. 감태와 치즈는 서로 말이 없다. 도시와 농촌 사이의 단절과 결코 다르지 않다.

꾸러미가 마지막 비상구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연고(緣故)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종친회, 향우회, 동창회부터 나설 일이다. 연고가 앞장서서 꾸러미가 오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 꾸러미는 ‘믿을 만한 상품’이기 이전에 오래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전통은 물론 현재와 미래가 담겨 있는 새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문재,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5월 23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