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클 만큼 큰 대한민국’에 필요한 멋


사람도 그러하듯이 나라에도 생애주기가 있다. 성장의 시기를 지나 언젠가는 침체와 쇠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 일컬어졌으나 성장동력을 잃고 실업문제와 주택난에 허덕이는 영국을 볼 때에 그러하고, 여전히 세계 패권국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오랜 세월 쇠퇴론에 시달려 온 가운데, 경제위기의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미국을 볼 때에도 그러하다. 또 패권국 미국에 가장 근접하는 2위 국가였던 일본은 어떠한가. 기나긴 경제불황 끝에 쓰나미 참사와 원전 사고를 겪고서는 휘청이고 있다.

대한민국은 태어난 지 65년이 되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은퇴 이후의 삶이 시작되는 ‘노년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나라가 겨우 65년 된 것 갖고 사람의 노년기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미 영국, 미국, 일본 등의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국가건설과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세계화, 정보화, 양극화라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동을 겪었고, 겪고 있다.

그런 가운데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갖고 있다. 작년에는 세계에 일곱 나라밖에 없는 국민소득 2만달러에 인구 5000만명 이상의 국가들을 가리키는 ‘2050 클럽’에 가세했다. 2011년도 구매력 평가를 기준으로 볼 때에 한국(3만340달러)은 일본(3만5530달러)과도 격차가 없을 정도이다(세계은행 2012년 10월18일).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거나 가져도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은 선진국들에 견주어 ‘클 만큼 큰 나라’라는 것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이른바 ‘압축적 근대화’를 겪은 나라이다. 선진국들의 경우 200년 이상 걸린 것을 대한민국은 40여년 만에 이루었다. 하지만 그만큼 피로도가 높고 노화의 속도도 빠를 수 있다.

사람의 노년기 삶에서 중요한 것이 뭘까?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힘’ 말이다. 필자는 그것은 부도 권력도 아닌 멋이라고 생각한다.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 등을 자아낸 그 모든 경험과 기억을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 드러내는 자기애와 혜안이라는 멋 말이다.

대한민국 역시 노년기의 사람처럼 이제 멋을 갖출 때가 되었다. 그럼 나라의 멋이란 무엇인가? 나라에 대해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는 멋 말이다. 그것은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민주공화제의 보편적 가치를 잘 구현하기 위해,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의 앙상하고 성마른 진영 논리에 기대 표출되는 시민들(주권행사자들) 간의 이견과 갈등을 지혜롭게 다룰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다. 나라에 대한 사람들의 자부심은 그 능력이 원활하게 발휘되어 사람들이 조화롭고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리라.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러한 멋을 느낄 수 있는가? 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에 기대어 타자에 대한 부정의 언행을 일삼고 있음을 너무나 빈번하게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의 사례가 5·18 광주항쟁에 대한 역사왜곡과 ‘일베’ 현상이다. 또 역사를 왜곡하고 민주공화제를 위해 생명을 바친 이들을 모욕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을 ‘쥐XX’로 지칭했던 것이나, 필자가 ‘사려깊지 못한 표현의 자유’라고 비판한 바 있던 ‘박근혜 출산’ 그림(2012년 11월19일자 경향시평) 등도 모두 멋스러움을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의 역사왜곡과 풍자라는 이름의 조롱과 모욕은 클 만큼 큰 대한민국에 필요한 멋이 아니다. 그러한 표현의 자유는 소모적인 보수-진보 갈등만 부추긴다. 문제는 그 갈등이 보수와 진보로 포괄되지 않는 다수 서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정치적 숙의와 조정의 시간을 빼앗고, 정치적 타협과 합의의 기반을 훼손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는 대한민국은 결코 아름다운 노년기를 맞이할 수 없다. 이것을 유념해야 한다.


김윤철,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5월 27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