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세상] 잉크가 마르는 시간


딱 한 명이었다. 큰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웠다. 출석을 부르고 난 다음, 만년필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스무 명 중 한 명. 스마트폰 사용자 3000만명 시대에, 그것도 대학생들에게 만년필을 쓰느냐고 묻는 것은 ‘반시대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문자의 위력, 글쓰기의 위상은 여전하겠지만 육필은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다. 종이 위에 쓰는 손글씨가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내가 강의실에서 만년필을 꺼내든 계기가 있다. 1994년인가, 이탈리아에서 스위스 제네바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만년필을 샀다. 처음 보는 브랜드였지만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다. 황금색 펜촉이 돌출되어 있었고(몽블랑보다 더 튀어나왔다) 문양도 특이했다. 뚜껑에는 꽃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느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었다. 평생 친구를 구한 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얼마 되지 않아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잉크가 안 나오는 것이었다. 200달러를 주고 산 만년필을 펜처럼 써야 했다. 하지만 촉에 잉크가 잔뜩 묻어 보기에 좋지 않았다. 결국 서랍에다 넣고 말았다. 글이 잘 안 써지는 밤, 가끔 꺼내 어루만지다가 다시 집어넣곤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18 년 만에 만년필을 ‘부활’시킬 수 있었다. 만년필을 전문적으로, 그것도 무료로 고쳐주는 인터넷 동호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 후배는 동물병원에 맡겼던 고양이를 안고 돌아오는 표정이었다. “선배, 살려냈어요!” 나도 살아났다.

글쟁이는 필기구에 예민하다. 거의 불치병 수준이다. 돌아보니, 내 글쓰기 이력은 필기도구의 이력과 일치했다. 중학교 2학년 때 형에게서 받은 영웅만년필을 시작으로 파이로트, 파카, 펠리컨, 몽블랑, 워터맨, 크로스, 오로라 등 내 손을 거쳐간 만년필은 스무 자루가 족히 넘는다. 그중 대부분은 지인들에게 선물로 줬고 지금은 두 자루밖에 없다. 그렇다고 만년필을 즐겨 사용한 것은 아니다. 만년필을 곁에 두고 타자기에서 워드프로세서, PC, 노트북을 거쳐 태블릿PC, 스마트폰으로 숨 가쁘게 바꿔왔다.

이번 가을, 내 글쓰기를 돌아볼 일이 있었다. ‘어어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유명한 묘비명이 떠올랐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처방전 중 하나가 만년필이었다. 오랜만에 교보문고에 들렀다. 전에 없던 일본 만년필이 진열돼 있었다. 작고 뭉툭했지만, 필기감이 제법 부드러웠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스탠드에 불을 켜고 백지를 꺼냈다. 이름을 써보았다. 만년필을 살 때마다 처음 쓰는 글자가 이름이다. 그 다음에는 최근 속으로 중얼거리는 문장들. 이번에는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라고 썼다. ‘우리는 모두 도시에서 죽는다’라고 썼다.

글을 쓰는 것과 글을 치는 것은 다르다. 종이 위에 손으로 쓰는 것과 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치는 것은 같지 않다. 걷기와 달리기만큼 차이가 난다. 걸으면서는 생각할 수 있지만 달리면서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정신의 근육, 사유의 피돌기는 산책(느림)을 통해 강화된다. 만년필에 잉크를 가득 채우고, 잉크병에 들어갔다 나온 펜촉을 천천히 닦아내는 시간,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은 거의 종교의식에 가깝다. 컴퓨터가 부팅되기를 기다리는 시간, 프린트를 기다리는 시간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강의실에서 말했다. 정보기술(IT) 강국이 되는 것도 좋다.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나오고, 우리 가요가 유튜브를 제패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필기구가 없다. 고유 문자를 가지고 있고, 자국 문학이 있는 나라가 제대로 된 필기구 하나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살아 돌아온 만년필 덕분에 늦가을이 견딜 만하다. 내 삶에 대해서도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세상도 조금 더 멀리 바라보게 되었다. 신문을 보니 내 만년필을 고쳐준 인터넷 동호회(펜후드)가 ‘2012 서울펜쇼’를 개최한다. 오는 17일 서울 종로구민회관. 단 하루만 열린다고 한다. 꼭 가봐야겠다.

이문재,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11월 14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