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 2013.02.06] 이문재 교수 칼럼


▶ 고즈넉했다. 2월 초순, 남도의 이른 아침은 차분했다. 월출산 서쪽 자락이 순하게 잦아들고 있었다. 해풍과 육풍이 교대하는지 바람 한 점 없었다. 달맞이하기에 좋대서 대월(待月)마을. 달맞이마을에서 아침 해를 맞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고샅을 어슬렁거리는 낯선 외지인에게 마을은 무심했다. 개조차 짖지 않았다. 기시감이나 직감 같은 것을 기다려보았지만 허사였다.

전남 강진군 성전면 대월리. 아버지가 8년간 피란살이를 한 곳이다. 1951년 1월, 40대 초반의 아버지는 연로한 아버지와 아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옹진 정든 땅을 뒤로했다. 순위도, 연평도, 백령도, 흑산도, 목포를 거쳐 이곳 강진에 피란 보따리를 풀었다. 강진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셋째 형이 태어났다. 1959년 늦봄, 일가는 강진을 떠나 김포에 정착했다. 통일이 되면 한시라도 빨리 고향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고향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내가 태어난 곳,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고향의 의미를 다 살린다면 내 고향은 세 군데다. 아버지께서 두고 내려온 황해도 옹진, 아버지가 피란살이를 한 전남 강진, 내가 나고 자란 경기도 김포. 그중에서도 두 번째가 애틋하다. 고향 아닌 고향. 어머니는 월출산 아래서 나를 잉태하고 그해 늦가을 김포에서 출산했다. 태어나서 54년 만에 처음으로 이른바 ‘회임지’를 찾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1959년 입춘 즈음, 월출산 동쪽을 바라보며 크게 흡월(吸月)하셨던 것일까. 그래서 월출산, 강진만, 강진 땅의 기운이 내 몸속으로 스며든 것일까.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강진 땅과 나의 ‘우주적 인연’을 외면해왔다. 지난 2월 초순, 대학에서 시민교육을 강의하는 선생님들을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나는 이번 생에 회임지를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대월마을에서 나의 개인사를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나야 할 역사는 더 있었다. 다산과 초의, 추사, 고려청자. 기억의 기원, 기억의 시간대를 다시 조정해야 했다.

기억은 상상력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미국의 진보적 법철학자 로베르토 웅거(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자신의 저서 <주체의 각성>에서 상상력을 새롭게 정의한다. 상상력이란 기억을 예언으로 바꾸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웅거 교수는 다시 말한다. “기억보다 예언의 목소리가 더 커야 한다.” 고향은 기억이 탄생한 곳, 기억이 출발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고향이 많을수록, 기억의 양이 증대될수록 예언의 목소리도 크고 높아질 것이다.

이번 설은 예전과 다르다. 김포 선산을 다녀오거나 황해도 이야기를 떠올리는 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만난 강진 풍경을 새로 각인시켜야 한다. 400년 된 느티나무, 아버지가 처음 세 들었던 오래된 기와집 문간방, 마을 앞 들판, 강진 읍내와 다산초당, 백련사, 청자박물관, 강진만, 월출산 등등. 기억이 증폭될 것이다. 그런데 뒤를 돌아다본 만큼 앞을 내다볼 수 있을까. 고향 땅을 미래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대월마을은 ‘예언’의 현장이었다.

여느 농촌처럼 노인이 대부분이지만 일찍부터 친환경 농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전통 테마마을, 팜스테이 분야에서도 앞서가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 여성들이 귀촌하는 마을이기도 했다. 시민교육 워크숍이 끝날 즈음, 귀촌한 여성이 도농직거래 회원으로 가입하라고 권해왔다.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강진사람들이 정직하게 키운 먹을거리가 배달된다. 새로 생긴 고향 땅을 매달 몸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기억은 말한다. 상상력이 기억보다 큰 소리로 말한다.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들이나 산골, 바닷가가 아니어도 좋다. 도시 한복판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시 곳곳에 땅을 만들어야 한다. 땅이 미래다. 땅을 절실해 하는 마음, 땅에 대한 감수성이 미래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지구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땅, 그 땅이 미래다.


이문재,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2월 6일자 경향신문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