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세상]  ‘온북TV’와 나비효과


‘이건 1인 시위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책 전문 케이블 채널을 설립하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잘나가는 사업가가 저런 말을 꺼냈더라도 한쪽 귀로 흘려버렸을 터였다. 요즘 세상에 24시간 책 방송이라니. 그런데 30년 가까이 알고 지내온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이었다. 한쪽 귀로 들어오는 취지와 구상이 다른쪽 귀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머릿속이 금세 가득 찼다. 지난해 말, 광화문에서 온북TV 조철현 대표를 만났을 때 얘기다.

그때만 해도 온북TV는 인터넷 매체였다. 10년 넘게 출판계와 독서계를 연결해온 독보적인 미디어였다. 하지만, 독보적이라고 해서 이윤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20년 전, 여산통신을 차릴 때도 그랬다. 출판사 신간 서적과 기업체의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대신 전달해주는 사업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호응이 대단했다. ‘틈새’를 발견하는 조 대표의 시력은 남달랐다. 하지만 그의 지갑은 늘 가벼웠다. 그는 냉정한 사업가라기보다 열혈 문화운동가처럼 보였다.

조 대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바둑, 낚시, 골프 채널은 있는데 왜 책 채널은 없느냐”고 항변해왔다. 그러면서 책 관련 콘텐츠를 하나하나 축적하기 시작했다. 2003년 인터넷에 책 전문 사이트 온북TV를 마련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온북TV는 주류 매체가 외면해온 현장을 찾아다녔다. 문익환, 윤이상, 조태일, 고은의 생애와 업적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고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경주 국제펜대회 등 대형 행사를 영상에 담아왔다. 남과 북의 문화 교류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2005년 60년 만에 성사된 남북작가회의 전 일정을 촬영했고, 2006년부터 남북 언어학자들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겨레말 큰사전> 편찬사업 또한 온북TV 카메라가 동행해왔다.

조철현 대표에게 책 전문 방송은 숙원사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출판계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늘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런 그가 지난해 말 팔을 걷어붙였다. 책과 독자를 연결하는 공적 통로가 갈수록 좁아지는 상황이었다. 출판계, 서점계, 도서관계, 인쇄계, 학계 인사를 찾아다니며 책 전문 채널의 필요성과 운영의 공공성을 강조했다. ‘1인 시위’의 반향은 컸다. 문학동네, 김영사, 범우사 등 22개 출판사가 출자했고 리브로, 부산 영광도서 등 서점 및 유통업계,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아침독서운동 등 관련 단체도 참여했다. 파주출판도시는 스튜디오 공간(900㎡)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엊그제 저녁, 조 대표가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개국 잘 했습니다. 다시 청년으로. 어게인 1980.” 1980년이면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일 것이다. 조 대표가 지난 4월23일, 스무 살 청년으로 다시 태어났다. 열 살 온북TV도 성인식을 치렀다. ‘온북’이라는 채널 이름에는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다. ‘온’은 모두, 전체라는 뜻이다. 온누리, 온생명. 따뜻할 온(溫) 자도 있다. 영어로는 on이다. 나는 이 on을 off의 상대어로 이해한다. ON BOOK TV. 책의 스위치를 올리게 하는 방송이다.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한국인이 3000만명을 넘어섰다. 디지털 문명이 신체에 부착되면서 책의 형태와 유통방식이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지식과 정보, 이야기와 이미지를 의미화하는 책 고유의 가치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책을 외면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사회다. 책을 무시하는 디지털 문명은 오래가지 못한다. 세계 책의 날, 케이블 방송에 작은 불이 켜졌다. 책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책 전문 채널의 ‘조용한 개국’을 지켜보다가 문득 나비효과가 떠올랐다. 공공성, 투명성, 지속성의 회복을 요청하는 1인 시위의 영향력은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가져오는 커다란 변화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온북TV의 개국이 책 읽는 인간, 생각하는 사회를 앞당기는 나비의 날갯짓이 되었으면 한다.


이문재,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4월 24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