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 2014.01.30] 이문재 교수 칼럼


▶ 농산물은 공공재, 농민은 공무원 - 이렇게 써놓고 혼자 중얼거리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농민을 공무 수행자로 봐야 한다니. 최근 두 매체에서 이 같은 ‘과격한’ 주장과 마주했다. 격월간 ‘녹색평론’과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농산물을 공공재로 인식하고, 농민을 공공재를 생산하는 공익적 존재로 대접해야 한다는 발언이 실렸다. 나는 ‘옳거니’하고 손뼉을 쳤지만, 위와 같은 제안에 쌍수를 들고 반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가족 친지가 한자리에 모이는 설 연휴다. 차례상을 물리고 나면 이야기꽃이 필 것이다. 정치권에 대한 성토에서부터 개인정보 유출 사태, 조류인플루엔자 확산은 물론 취업, 결혼, 입시, 건강 등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차례상에 오른 생선이나 과일의 원산지를 따질지언정, 농업의 오늘과 내일에 관한 언급은 아예 없거나 있다 해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설령 농업 현실에 대한 대화가 오간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탄식으로 끝날 것이다. 단군 이래 최고 수준이라는 우리의 풍요와 편리가 사실은 농업의 전적인 희생 위에 이뤄진 것이라는 거대담론은 환영받지 못한다. 도시는 농촌을 착취하는 ‘거대한 빨대’라는 메타포도 외면당한다. 쌀을 제외하면 식량 자급률이 5% 미만이라거나, 선진국이 식량을 무기화하면 우리는 대처할 방법이 전혀 없으니 농업을 되살리는 일이 대단히 시급하다는 이야기도 여간해선 씨가 먹히지 않는다.

경제가 성장하면, 경기가 좋아지면, 그래서 취업을 하고 소득이 올라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땅과 생명, 자연과 지구를 외면한 채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 가능할까. 이 같은 발상은 물과 음식을 챙기지 않고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겠다는 무모함과 전혀 다르지 않다. 농업을 외면한 미래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농업을 재발견하지 않고서는 더 나은 세상을 준비할 수 없다.

귀농이나 귀촌, 도·농 직거래, 도시농업도 매우 의미 있는 노력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농산물을 공공재로 규정하고 농민을 공무원급으로 대우하자는 의제가 바로 그것이다. <토종곡식>의 저자이기도 한 농부 백승우씨는 ‘녹색평론’(1·2월호)에서 농산물은 엄연한 공공재라고 말한다. 그는 농업이 국토 보전, 수자원 함양, 자연환경 보호, 경관의 형성, 보건 휴양, 문화적 소산의 전승, 지역사회의 유지 및 활성화, 식량 안전 보장 등 여덟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는 이유를 들면서 농산물을 강력한 공공재라고 정의한다. 농사는 농민 개인의 사적인 경제 행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프레시안’(1월28일자)에 농민을 준공무원으로 우대해야 한다는 글을 실은 정기석 정의당 국회정책연구위원도 같은 맥락이다. 정 연구위원은 농업뿐만 아니라 농민운동이 한계에 다다른 지금이야말로 발상을 전환할 때라고 말한다. 노동자, 도시인과 적극 연대하는 가운데 농업을 국가 기간산업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유기농에 종사하는 농민을 공무원 수준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공공재인 농업과 농촌의 다원적 기능을 경제적으로 환산하면 연간 약 50조원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백승우씨가 강조했듯이 공적 재화와 공공 서비스는 남녀노소, 직업과 빈부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농수축산물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가 가장 위험한 사회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물이 늘어나지 않는 근본 이유 중 하나가 식량을 공공재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가 농민을 공적 재화를 생산하는 공무 수행자로 인정한다면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농민뿐만 아니라 청년 실업자와 은퇴자가 농업을 다시 보게 된다. 들과 산, 강과 바다가 안정적이고 품위 있는 창의적 삶의 터전으로 거듭난다. 농업, 농촌, 농민을 재정의해야 한다. 그래야 일과 삶, 도시와 농촌,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문재,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1월 30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