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 2014.02.27] 이문재 교수 칼럼
▶ 약력을 쓸 때마다 주춤한다.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거나 책을 펴낼 때, 출생연도와 출생지, 학력, 등단연도, 저서 등을 열거한다. 원칙 같은 것은 없지만 관례처럼 굳어져 있다. 관례가 갖고 있는 미덕이 없지 않으므로 나도 저 순서대로 적는데, 출생지에서 곤혹스러워진다. 줄곧 경기도 김포라고 써오다가 얼마 전부터 경기도 김포(현 인천 서구)라고 쓴다.
내가 나고 자란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1995년 인천시가 광역시로 확대될 때 강화, 옹진군과 함께 인천으로 편입됐다. 그러니까 1995년 이후에는 인천 (서구) 출생이라고 적었어야 한다. 그럼에도 경기도 김포를 고집했다. 내심 옛 고향땅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소만 사라졌다면 상실감은 미지근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고향땅은 뽕밭을 수몰시키는 바닷물처럼 무서운 속도로 달라졌다. 뒷동산이 없어지고, 물길이 달라졌다. 논밭이 있던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구불구불하던 고갯길을 깔아뭉개고 4차선 직선도로가 뚫렸다. 말 그대로 강산이 변했다. 주소가 사라지기 이전에 풍경이 먼저 사라졌다. 기억을 대입시킬 수 있는 지형지물이 남아 있지 않다. 기억이 장소로부터 버림받았다.
그사이 주소가 참 많이도 바뀌었다. 결혼한 뒤 부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고양시로. 단독에서 단독으로, 단독에서 아파트, 아파트로. 직장 주소도 대여섯번 달라졌다. 여의도에서 광화문으로, 삼선교로, 다시 광화문으로 복귀했다가 직장 주소 없음(비정규직)으로. 그리고 회기동. 돌아보니 도시인은 ‘이사하는 인간’이었다. 근사하게 표현하자면 노마드, 본질적으로 정의하자면 디아스포라(도시 유민).
100년 가까이 사용해온 지번 주소가 도로명 주소로 전환됐다. 여기저기서 옥신각신이다. 나도 당혹스러웠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인데 앞으로는 고양시 덕양구 화신로라고 써야 한다. 화신로? 무슨 뜻일까. 행신동이란 지명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담겨 있다. 300년 전 청주 한씨 자손들이 이곳에 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서로 믿으면서 살라는 뜻으로 행신(幸信)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신로는 어떤 기원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도로명 주소에 대한 여론은 그리 좋지 않아 보인다. 도로명 주소가 ‘신자본주의 창씨개명’이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사업이라는 진단도 있다. 사대주의와 국수주의의 대결이라고 보는 쪽도 있다. 대안도 눈에 띈다. 역사성과 장소성을 보존하면서 도로명 주소를 정착시키자는 것이다. 새 도로명 주소에 기존 동리 명을 함께 쓰자는 제안이다.
도로명 주소를 시행하면 연간 4조3000억원에 달하는 경제적 효과가 발생한다고 한다. 대단한 사업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마음의 문제’ 말이다. 고향을 잃어버린 상실감, 도시 유민의 자기 모멸감, 오래된 지명에 대한 친근감 같은 것은 수치화하기가 어렵다. 도로명 주소의 태생적 한계는, 정부의 모든 정책이 그렇지만, 계량할 수 없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경제 논리일지도 모른다.
장소, 즉 땅에서 비롯된 오래된 이야기는 개인과 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다. 오래된 이야기가 없는 사회가 ‘비정상’이다. 오래된 것이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는 사회처럼 경박한 사회도 없다. 오래된 것이 없다면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도 불가능하다. 도로명 주소가 가뜩이나 좋지 않은 우리 사회의 기억력을 기억상실증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데 기여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자칫 ‘정상의 비정상화’로 돌변할 수도 있다.
이문재,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2월 27일자 경향신문
조회 : 5,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