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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2014.06.12] '지금 여기서 프리모레비를 읽는다는 것'

홀로코스트 겪은 유대인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번역 출간 계기로 북콘서트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과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두 인문학자가 만났다. 지난 10일, ‘딴지 카페’로 알려진 서울 동숭동 지하 라운지 ‘벙커1’. 두 사람은 200여명의 청중과 함께 ‘지금 여기서 프리모 레비를 읽는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3시간여에 걸쳐 대화를 이어갔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40년간 문학을 통해 나치 만행에 대한 증언을 계속하던 프리모 레비가 1987년 돌연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낸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돌베개 펴냄)의 번역출간이 이날 대화의 계기가 됐다.

참석자들은 세월호 사건으로 우리 사회 핵심 화두로 떠오른 권력의 만행에 대한 기억과 증언 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지, 거기에 희망은 있는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펼쳤다.

프리모 레비를 한국에 소개한 서 교수가 먼저 2003년 <엔에이치케이>(NHK)에서 방영한,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아우슈비츠 생존자는 왜 자살했는가’의 압축영상을 보여준 뒤 발제를 했다. 도 교수가 여기에 멘트를 보탠 뒤 청중들 질의에 답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지면 사정상 질문 내용을 따로 담진 못했다.

서경식 먼저 세월호 사건 희생자분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싶다. 이번 책 제목이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인데,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상징적이다. 홀로코스트나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세월호 사건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사회구조적인 것이 문제라는 것,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에 대해 과연 증언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런 기억들을 제대로 보존하고, 진상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을 하면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즉 기억과 증언의 문제가 이 책에 나타나는 프리모 레비의 인식과 후쿠시마의 원전, 세월호 문제를 연결시키는 문제의식이라고 본다.

도정일 레비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세월호를 통해서 우리에게로 돌아오고 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으면서,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아야 할 새삼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수백만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잿더미로 날려버린 나치의 만행은, 나치즘 아래서 조직된 군대의 또는 정치조직의 일만이 아니었다. 만행에 가담한 사람은 독일 국민 전체였다. 비록 명시적 가담은 아니었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협력을 통해 독일 국가 전체가 그 만행을 만들어냈다. 레비가 죽지 않고 끝까지 생존한 동기가 있었다면, 그 만행을 반드시 세상에 나가서 증언하겠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서 기억과 증언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우선 증언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언론의 자유. 이건 증언해도 되는지 두려움이 있으면 증언을 제대로 못한다. 그리고 증언을 들어주는 귀라고 할까,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성적인 폭력에 대해 증언하더라도, 여자니까 외면당하는 풍토라면 증언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기억하고 증언하고 진상 규명을 할 수 있는 제도적인 사회를 만들어내려는 행동, 그것이 분명 필요하고, 이 행동과 기억이 있어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

서경식
세월호·후쿠시마·유대인 대학살
공통점은 사회구조 문제이자 인재
증언 통한 ‘부정의’ 처벌
프리모 레비가 살아남은 이유

도정일
인간이 태어나 할 일은
의미 없는 것에 의미 집어넣기
희망 없는 곳에 희망 넣기
정의 없는 곳에 정의 세우기

도 생물학적 존재로부터 자기 자신을 윤리적 존재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버거운 과업을 안고 있는 것이 인간인데, 이 버거운 과업에 있어서 윤리적 인간은 늘 생존 명령 앞에 굴복한다. 그러면 다들 어쩔 수 없다는 얘기냐. 그로 인한 위기, 그게 레비가 수용소에서 끊임없이 겪었던 문제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 더 구체적으로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휴머니티.’ 이것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이것이 모든 문명 사회의 과제이자 주어진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정말로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세 가지 있다. 의미가 없는 것에 의미를 집어넣기.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을 집어넣기. 정의가 없는 곳에서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를 만들고 희망을 주입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 이 세 가지 이상으로 인간에게 중요한 일이 있는가? 없다.

서 프리모 레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서 인간의 개념을 재건하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질 나쁜 이기주의자들에게 중국의 문호 루쉰이 한 말인데, ‘조금이라도 그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어주기 위해 살고 있다’고 했다. 몹시 공감한다. 내가 일본에서 소수자로 살면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이유가, 미워하는 부정의한 나쁜 놈들에게 한 점이라도 기분 나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도 나도 본질적으로 비관론자다. 인간의 삶에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의미를 주입하는 상징의 우주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희망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절망에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희망 없다는 이 바닥으로부터 몸을 일으켜서 희망을 주입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고약한 운명이다. 그 조건을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쓸쓸하고도 허무한, 그러나 그것 말고는 달리 우리 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게 없어 보이는 그 작업을 해야 한다. 이 쓸쓸함의 위안의 메시지를 여러분께 전달하게 되어 대단히 쓸쓸하게 생각한다.

<‘한번 더 풀어쓴’ 서경식과 도정일의 대화>

“기억을 제대로 보존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하면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해 나갈 수 있는가. 즉 기억과 증언의 문제가 이 책에 나타나는 프리모 레비의 인식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세월호 문제를 연결시키는 문제의식이라고 본다.”

지난 10일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과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이 두 인문학자가 만났다. 이들은 ‘딴지 카페’로 알려져 있는 서울 동숭동 지하 라운지 ‘벙커1’에서 200여 명의 청중들과 함께 ‘지금 여기서 프리모 레비를 읽는다는 것’이라는 주제 아래 3시간여에 걸쳐 열띤 대화를 이어갔다.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40년간 문학을 통해 나치 만행에 대한 증언을 계속하던 프리모 레비가 1987년 돌연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낸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돌베개 펴냄)의 번역출간이 계기가 됐다. 참석자들은 세월호 사건으로 우리사회 핵심 화두로 떠오른 권력의 만행에 대한 기억과 증언 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지, 거기에 희망은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프리모 레비를 한국에 소개한 서 교수가 먼저 2003년 <엔에이치케이>에서 방영된,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아우슈비츠 생존자는 왜 자살했는가’의 압축영상을 보여준 뒤 발제를 했고, 도 교수가 멘트를 보탠 뒤 청중들 질의에 답하는 식으로 대화는 진행됐다. 이를 순서대로 발췌요약한다. 지면사정상 질문내용을 따로 담진 못했다.

서경식: 먼저 세월호 사건 희생자 분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싶다. 이번 책 제목이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인데,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상징적이다. 홀로코스트나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세월호 사건은 다르지만 그래도 공통점이 있다면, 사회구조적인 것이 문제라는 것,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는 것, 그것도 사회구조와 깊이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증거와 기억, 이런 일에 대해 과연 증언할 수 있을지, 우리가 증언을 제대로 들어줄 수 있는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하는 문제, 그리고 두 번째가 기억이다. 이런 기억들을 제대로 보존하고, 계속해서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을 하면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는가 하는 두 개의 문제, 즉 기억과 증언의 문제가 이 책이 담고 있는 프리모 레비의 인식과 후쿠시마의 원전, 세월호 문제를 연결시키는 문제의식이라고 본다.

일본에서는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2천 명 이상이 그 사건과 관련해 사망했다는데, 그 직접적인 관련성을 도쿄전력과 국가가 인정해주지 않아 책임과 배상이 애매모호한 상황이다. 심지어 일본의 총리가 도쿄 올림픽 유치전을 벌일 때는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완전한 통제 아래 있다고 했는데, 거짓말이다. 이 거짓말을 온 세계를 향해서 하고 또 일본 국민 대다수가 거기에 박수를 쳤다. 무자비한 무관심과 망각이 일본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은 일어난 지 한 달 반 정도인데, 이것을 기억하는 것, 증언하는 것이 중요한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프리모 레비의 문제제기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다. 기억은 권력, 책임져야 할 지배자와 싸울 때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무기다. 그런데 기억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오래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기억의 투쟁은 20세기 후반에 세계적으로 중요한 명제 또는 과제였다.

기억투쟁 중에 중요한 것이 홀로코스트였다.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전례없던 일이 벌어졌다. 그런 일을 우리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제대로 뒷 세대들에게 전달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기억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억 투쟁도 그 중의 하나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산증인인 피해 할머니들이 증언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그로부터 20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런 일 없었다고,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언론계나 교육계를 지배하려 하고 있다. 기억에 대한 폭력과 왜곡이 개가를 올리는 것이 지금의 일본이다. 199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시작된 기억투쟁은, 지금은 역사 부인론자들,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이기고 있는 국면에 처했다.

프리모 레비라는 이탈리아 유대인이 20세기 초반에 독일에서 있었던 잔혹행위, 전쟁행위에 대한 증언을 했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기억의 투쟁의 하나의 기준이자 척도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비롯해서 프리모 레비의 저작들이 한국에서 거의 다 출간됐다는 점은 아주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중요한 일이다. 2006~2007년 2년간 한국에 와서 안식년 휴가를 보냈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에는 프리모 레비의 저작 번역본이 한 권도 없었다. 6~7년 만에 마지막 저작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끝으로 그의 저작들이 거의 다 번역됐다는 게 너무나 좋은 일이고, 또 이렇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

강제수용소 수용자 중 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존자의 한 사람으로 40년 동안 증언자로, 문학자로 살고 작품도 세계적으로 평가받고, 이탈리아에서는 문화적 영웅이라는 호칭까지 얻은 그가 자살을 했다. 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 가장 집중적으로 파고 든, 프리모 레비 본인이 해답을 제시한 그의 마지막 책이다. 프리모 레비는 정말 지옥의 바닥에 가라앉은 자들 대신에 자신에게 증언할 자격이 있는지를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우리가 결국 자살하고 만 인생으로부터 무얼 배울지, 어떤 교훈을 얻을지가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도정일: 오늘 여러분들은 레비가 갖고 있던 가장 중요한 관심, 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숙제 같은 것을 서 교수 얘기를 통해 전해 들었다. 기억투쟁이란 것이 있었고, 증언을 통해서 한 시대의 인류사에서 인간이 동료 인간을 향해 저질렀던 무자비한 만행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는가? 레비가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 오늘 잘 정돈되어 우리에게 전달됐다.

레비 사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우리는 그의 저술 때문에, 그가 던진 질문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과 만나게 됐다. 특히 세월호 사태 이후 레비처럼 우리에게도 가라앉은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들의 절망과 그들이 겪었을 공포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은 그들의 뼈아픈 절규들. 그것을 기억하는 건 대단한 문제다. 당신들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 이것이 생존자들이 진도 바다에 가라앉은 사람들에게 한 약속이다.

레비가 하고자 했던 일은, 그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세월호를 통해서 우리에게로 돌아오고 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으면서,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아야 할 새삼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치의 만행은, 수백만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잿더미로 날려버린 나치의 만행은, 나치즘 아래 조직된 군대 또는 정치조직의 일만이 아니었다. 더 본질적으로 문제는 만행에 가담한 사람이 독일 국민 전체였다는 것이다. 비록 명시적 가담은 아니었을지라도 침공을 통해, 보이지 않는 협력을 통해 독일 국가 전체가 그 만행을 만들어냈다. 레비가 죽지 않고 끝까지 생존한 동기가 있었다면, 그 만행을 반드시 세상에 나가서 증언하겠다는 것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