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엊그제 학교 앞 상가를 지나다가 멈칫했다. ‘순살’ 치킨을 ‘순실’ 치킨으로 읽은 것이다. 혼자 피식 웃다가 머쓱해지고 말았다. 소위 최순실 게이트가 어느새 내면화됐다는 증거다. 리을(ㄹ)을 ‘근’ 자로 읽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미용 시술법과 관련 의약품 이름도 귀에 설지 않다. 연일 소용돌이치는 정국이 무슨 전염병처럼 보인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좇느라 집중력은 물론 식욕까지 떨어진 걸 보면 나도 감염된 게 확실하다. 

그사이, 주 5일 근무제가 무너졌다. 주말마다 광장으로 나가 야근이다. 지난 토요일에는 올해 대학에 들어간 아들과 함께 광화문으로 나갔다. 아들은 ‘바람에 절대 꺼지지 않는다’며 LED 촛불을 들었다. 늦은 저녁 청계광장으로 접어들었을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 밤 지새우고~.’ 30여년 전 내가 지금 아들 나이일 때 불렀던 노래, 술에 취했다가도 척추를 바로 세우고 불렀던 바로 그 노래였다.

백만 촛불이 ‘끝내 이기리라’를 목청껏 외치는 동안, 백만 촛불이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는 동안, 1분 동안 촛불을 끄는 동안, 현대사의 몇몇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10·26, 5월 광주, 6월 항쟁, 구제금융(IMF), 노무현, 광우병, 세월호. 그리고 오늘, 머리가 희끗희끗한 유신세대인 아버지와 이제 막 투표권을 갖게 된 세월호 세대 아들이 백만 촛불 한가운데 손을 잡고 서 있다.

함성과 구호가 이어졌다. ‘고산병연구회’ 깃발이 지나갔다. 11시경 귀가하기 위해 서대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차량이 없는 대로. 일부러 노란 중앙선을 밟으며 걸었다. 평상시에는 꿈도 꾸기 어려운 대로 한가운데를 걸으며 연전에 읽었던 <두려움 없는 미래>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호스피스와 산파가 절실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호스피스와 산파는 대조적이다. 호스피스는 삶의 끝을 배웅하는 자이고, 산파는 이제 막 지구에 도착하는 새 생명을 마중하는 자다. 하지만 공통점이 없지 않다. 둘 다 죽음과 탄생의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둘은 몇 가지 특별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 우선 지극해야 한다. 온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삶의 맨 끝과 맨 처음에 개입할 자격이 없다. 감정이입과 전문 기술, 즉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래야 죽음을 애도하고, 탄생을 환대할 수 있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역대 최저치다. 정당에 대한 대다수 국민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12월로 접어들면서 평일에도 집회가 이어지고, 아파트와 상가에 퇴진 구호를 내거는 주권자들도 있다. 아무래도 이번 겨울이 길어질 것 같다. 청와대와 여의도의 잇따른 ‘간계’를 지켜보면서 떠오르는 질문이다. 지금 누가 호스피스이고 누가 산파인가. 우리가 호스피스라면 우리는 지금 무엇의 마지막을 목도하고 있는 것인가. 저들이 산파라면 저들은 무엇의 순산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가.

호스피스와 산파의 역할을 문명사적 맥락에서 재정의한 실천지성이 있다. 미국의 저명한 불교 지도자이자 평화운동가이며 생태철학자인 조안나 메이시. 그는 근본적 변혁이 세 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위기를 맞아 낡은 옛것을 떼어내는 과정이고, 세 번째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단계다. 문제는 그사이 두 번째 위기다. 낡은 것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데다 새것은 아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행의 시간, 불확실성의 국면이다. 

우리는 지금 첫 번째 위기를 통과하고 있다. 주권의 상징인 촛불을 들고 호스피스 역할에 충실해야 할 때다. 동학과 삼일운동 이래, 4·19 이래, 5월 광주 이래, 87년 체제 이래 누적돼온 부패와 불의를 추방해야 한다. 공공성을 무시하고 사리사욕에 집착하는 도덕적 불감증을 치유해야 한다. 어쩌면 벌써 두 번째 위기 국면인지도 모른다. 지금이 두 번째 위기라면 장례식과 동시에 탄생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나서서 호스피스이자 산파 역을 담당해야 한다. 저 둘이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촛불이 지금과 다른 미래, 즉 정의와 평화를 우선하는 ‘전환 설계’의 주역이 되어 지속가능한 사회를 꿈꿔야 한다. 

‘위기를 낭비하는 것은 범죄’라는 경구를 잊지 말자. 조안나 메이시가 경청할 만한 권고를 한 바 있다. 변화는 개인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변화는 개인 간의 상호활동, 교류,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오랜 적폐를 일소하는 호스피스로서,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맞이하는 산파로서 우리가 시급히 발휘해야 할 역량이 있다. 성찰하고 표현하고 공감하고 연대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뛰어넘는 ‘큰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그날부터 새날이다.

이문재,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12월 2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