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시스템에선 장기적인 교육정책의 수립이나 운영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난 정부에서 국민 대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했던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시대착오적 정책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정권에 따라 BK, HK, ACE, 프라임 사업 등으로 대학을 흔들고, 학생들을 입시 경쟁과 이기주의로 내모는 학교 교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치 교육감 선거와 지방 교육청 운영에서 확인할 수 있듯, 우리 시민사회는 이미 충분히 성숙한 의식과 운영 역량을 갖고 있다. 문제는 이를 뒷받침해 줄 제도가 없다는 데 있다. 핀란드나 교육 선진국의 교육 시스템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 그러한 제도를 시행할 개혁 방안을 이제 진지하게 모색해야만 한다. 시대를 뒤집는 용기는 일상의 습관화된 판단에선 어려운 법이다. 교육부를 폐지하거나 행정부에서 독립시키고, 지역별 자치권을 강화하는 개혁안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교육은 통조림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해 내듯 학생들을 찍어내고 있고, 교수나 교사들 역시 패키지 교육의 가이드로 전락해 있다. 속도와 편리함 속에서 포장된 쾌락을 추구하는 가운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육성(育成)’을 필요로 하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교육의 내용이다. 자본의 폭주를 대체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교정하는 역할을 무엇이 할 수 있을 것인가. 교육의 전면적 복원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이 책은 무한경쟁을 지향하는 교육에서 무한책임을 지향하는 우리 시대 교육의 독립을 선언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희망철학연구소의 집필자들은 최고선으로서 교육의 가치, 새로운 연대를 위한 교육의 분권과 자치, 우정의 통일교육 등을 논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인간의 자기 소외와 파괴를 말할 정도로 괴물로 변해 있다. 교육이 최고선으로 간주되는 서구의 전통과 비교하면, 우리 사회의 교육은 정치와 경제,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있다. 시급히 교육을 최고선으로 간주하는 결단과 그에 따른 제도적 장치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교육 기회의 평등과 전환, 교육의 분권과 자치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다. 교육이 특정 정권이나 자본의 논리로부터 벗어나 참다운 교육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선 그 독립이 전제되어야 한다. 교육의 독립 없이 학문은 있을 수 없고, 학문의 자율 없이 국가 경쟁력 또한 있을 수 없다. 4차 산업혁명이 화두로 떠오른 시대에 국가 주도의 역사교과서로 논쟁을 벌이는 어이없는 사태는 이제 마감해야 한다. 이제는 먼 과거의 얘기가 되어버린 남북한 관계 정상화에 대한 논의도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재개할 통일교육의 목표는 평화를 지향하는 우정의 교육이 되어야 한다. 남북의 대중이 세계시민으로서 타자들의 특이성과 이질성을 배려하는 모습을 지닐 때 우정의 공동체가 비로소 가능하다.
마사 누스바움은 ‘공공교육의 목적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고 그들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는 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적절한 공감은 훌륭한 시민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감 능력을 가르치는 일이 중요한 과제인 이유이다. 공감 능력은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체험으로 인식하는 힘이다. 부조리한 사회, 삶의 무게에 고통 받는 동시대의 사람들이 겪는 무게를 자신의 아픔으로 동감하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능력이다. 촛불집회에서 보였던 시민의 연대와 협동의 모습은 학교에서 행해지는 그 어떤 수업보다도 훌륭한 민주주의 교육이었다.
이제 우리 사회의 교육은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사회적 책임을 배우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시민 의식을 가진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다. 자본의 폭력성을 이해하고, 포스트 휴먼 시대에 교육의 과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서 교육개혁은 이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철학적 지혜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세상을 해석하는 데 있지 않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 교육혁명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교육의 독립과 자치, 철학에 기초한 교육개혁의 길에 다 함께 나서기를 권고한다.
2017년 봄
희망철학연구소 집필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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