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2017.08.27]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상상력, 동양신화...다시 돌아온 물질의 시대, 정답은 신화에 있다.
▶다시 물질이 돌아왔다. 도처에서 물질의 근원적 힘을 구가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증강현실(AR) 등으로 수식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과학, 기술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하여 바야흐로 물질이 압도하는 세계가 전개될 것이다.

교감·상상력·이미지·스토리가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마인드
그 네 가지의 원천이 바로 신화
포스트휴먼 시대의 나침반 역할
인간 정체성 위기 때 빛 발할 것

이 시대에 대한 예후는 어떠한가. 고기술-고임금 직업과 저기술-저임금 직업 간의 격차가 커져서 심각한 사회 불균형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견해(클라우스 슈밥)로부터 로봇이 인간의 고유 영역을 공유함에 따라 인간 의미에 대한 집단 정체성의 위기가 올 것이라는 견해(일라 레자 누르바흐시) 등에 이르기까지 일부 부정적인 전망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 낙관적인 진단을 내리고 있다. 가령 스티븐 핑커는 폭력, 절대빈곤 등의 감소와 질병퇴치 등을 이룩한 과거 과학의 업적에 의지하여 오늘의 과학이 성취할 미래를 유토피아에 준하는 세계로 전망하고 있다. 아울러 향후의 세계를 놓고 스티븐 핑커, 알랭 드 보통 등 대표적 지식인들이 논쟁을 벌인 멍크 디베이트의 결과는 70%의 청중이 낙관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결판이 났다.

인문학적 지혜는 과학 초월한 외연적 의미

이처럼 압도적인 데다가 급변하기까지 하는 과학의 위력에 인문학은 일찌감치 투항 혹은 영합하는가 하면 어렵게 활로를 모색 중이다. 가령 이야기하는 본능은 거울뉴런의 시뮬레이션 작용으로 이해되고 중용의 철학은 쾌감 호르몬의 한시적 효과에서 비롯한 생존 방식으로 간주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초인적 서사도, 성인 공자의 근엄한 도덕론도 진화생물학의 설명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다.

생물학자 윌슨의 구상대로 인문학 역시 과학으로 통섭될 운명에 놓인 것인가. 과연 그런가. 뇌에서 분비되는 쾌감 호르몬 도파민은 우리를 한순간 사랑에 눈멀게도 하지만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눈꺼풀에 씌운 것을 벗겨 놓아 제정신(?)으로 돌아가게 한다. 절세미인과 신혼의 단꿈도 잠깐, 몇 년 후 그녀를 볼 때의 쾌감 호르몬 지수가 거실의 소파를 볼 때와 별 차이 없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서고금의 성현들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바, 지나친 탐닉을 경계하는 절제와 중용의 미덕이란 결국 쾌감 호르몬의 작용에 잘 적응하여 보다 안정된 삶을 유지하려 하는 생물학적 선택으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여 이제야 비로소 고대의 인문학적 지혜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말해야 옳지 성현의 말씀도 기껏 호르몬 작용에 불과했다고 일축하는 것은 본말의 전도이다. 아울러 인문학적 지혜는 과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외연적 의미를 함축한다. 공자는 중용의 철학에 따라 “즐겁되 음란하지 않고, 슬프되 마음 상하지 않아야(樂而不淫, 哀而不傷)” 할 것을 가르쳤다. 고대 동양에서 이러한 감정의 조절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가. 그것은 자연과의 합일에서 이루어졌다. 정경교융(情景交融)! 우리의 마음은 자연 경물과 만날 때 조절된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극단적인 감정은 자연을 대하면서 담백해지기 마련이다. 고대 동양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자연에 한번 담갔다가 꺼낼 때 순화된다는 지혜를 일찌감치 터득했던 것이다. 동양의 문학, 예술은 바로 이러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정점으로 추구한다. 과학이 쾌감 호르몬의 설명 차원을 넘어서는 이러한 인문학적 함의에 도달하기엔 시기상조이다.

그럼에도 4차 산업혁명 시대를 견인하는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달이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찬탄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과학만능주의와 그로 인한 일말의 두려움과 더불어 장밋빛 미래가 환상처럼 펼쳐지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데자뷔(deja vu)의 느낌에 사로잡힌다.

다시 말해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낙관론,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전망이 풍미했던 19세기 과학혁명과 같은 상황이 지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성-과학-기술공학-진보-미래는 19세기의 마법적 표현양식이었는데(뤼시앵 보이아) 지금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 시기에는 모든 것을 물리-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 하에 물질이 정신을 대체하고 인간을 일종의 기계로 인식하였다. 보라! 오늘날과 얼마나 근사한가. 인간의 상상력은 세계를 구조화시킬 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는 원형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너나없이 과학의 성과에 도취되어 있을 뿐 중요한 결락(缺落)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도 개벽된다는 원불교의 가르침도 있듯이 과학이 도약하면 그것에 상응하여 우리의 의식도 변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이 업그레이드 되고 있는데 정신만 제자리에 있으면 과학은 더욱 통제할 수 없는 길로 가고야 말 것이다. 여기서 정신도 물질처럼 진화, 발달하는 것으로 오해하지는 말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4차 산업혁명이 도래했다면 그것에 걸맞은 마인드를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쇄신된 인문학적 지혜에 대한 요청이 아닐 수 없다.

상상력은 시대를 초월해 반복되는 원형

사실 4차 산업혁명의 첨단에서 벌써 이러한 문제의식이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로리 개릿은 합성생물학 분야에서 생명과학의 이중용도 연구, 생물안전, 생물보안에 대해 일관된 규정이나 정의가 전혀 없음을 우려한다. 이중용도 연구란 예컨대 암모니아 생산 방법이 비료 산업을 촉진시켰으나 화학무기 제조에 악용되었던 것처럼 이해의 양면성을 지닌 연구를 말한다. 한편 일라 레자 누르바흐시는 로봇이 점차 우리의 윤리적, 법적 틀 구조를 시험하게 될 미래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등 로봇공학 분야의 종사자들을 위한 윤리, 인권, 보안 등의 교육과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현실을 걱정한다.

과학혁명 초기에 매리 셸리는 인조인간의 위험성을 다룬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써서 영혼 없는 과학만능주의의 폐해를 냉엄하게 지적한 바 있다. 셸리의 소설적 상상력은 여전히 오늘에도 유효한 교훈적 시사를 담고 있다.

어쨌든 이 모든 견해는 궁극적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인간과 사물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마인드의 정체는 무엇인가. 다가올 시대는 마치 인드라망처럼 인간과 사물이 상호의존 관계 속에 있고 인간과 기계 등 이타성(異他性)을 지닌 존재들이 교감하고 공존하는 세계로 점쳐진다. 이러한 현상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의 발달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세계에 진입하였다. 물질은 죽은 존재가 아니다. 십수년간 몰았던 승용차를 폐차장으로 보낼 때 나는 애도했다. 스티브 잡스가 뛰어난 것은 이러한 세계의 도래를 선취하여 제품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애플사 제품이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 인간성(Humanity)과 인문학(Liberal Arts) 그리고 테크놀로지를 들었는데 상품 기계가 우리와 교감할 수 있도록 따뜻한 감성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인간과 사물이 교감하고 상호의존하는 세상

교감 능력과 더불어 다음 시대의 마인드를 차지할 인문학적 능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상력과 이미지 그리고 스토리의 능력일 것이다. 기계가 인간의 수족을 완벽히 대신할 때 인간이 그나마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은 상상력일 것이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생과 기업의 성패를 가를 정도로 아이디어의 비중이 커질 것이라는 생각은 이미 다수 학자들의 공론이다. 다음으로 이미지. 우리 모두는 진작부터 이미지에 포위된 삶을 살고 있다. 급증하는 이미지 대폭발의 시대에 그것의 장악과 활용 능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재론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토리의 능력인데 유발 하라리는 인류 전 시대를 통하여 허구의 서사를 상상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의 대작 두 권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인류를 지탱해온 각종 이데올로기, 종교 등을 모두 상상의 스토리로 간주한다. 스토리의 능력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그 중요성이 감쇄되지 않을 것이다. 롤프 옌센은 비록 기업과 시장에 치중하고 있긴 하나 정보사회 다음에 스토리의 사회가 올 것이라고 진단하며 그 사회를 ‘꿈의 사회(Dream Society)’로 규정한다. 그에게 스토리는 다음 시대 인간의 존재 방식이기까지 하다.

위에서 제시한 교감 능력, 상상력, 이미지, 스토리에는 일관된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 모두 이성보다 감성 영역에 속하는 능력들임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이들은 한 가지 근원 서사로 귀납되는데 그것은 바로 신화(Myth)이다. 신화는 인간이 사물과 대화했던 시기의 산물로서 여전히 풍부한 교감 능력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맨 처음 떠올린 생각과 형상이 담겨있어 상상력과 이미지의 원천이기도 하다. 아울러 가장 오래 살아남은 이야기로서 모든 스토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신화야말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마인드를 예비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인류의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이른바 포스트휴먼의 시대로 가는 도상에서 인간 정체성의 위기를 실감하는 이즈음 신화는 더욱 그 빛을 발한다.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다시 길을 찾아가듯이.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8월 27일자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