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2018.04.27] 조은아 교수 [세상 속 연습실] “창피하기 싫으면 담력을 기르라…담력을 기르려면 연습하라” 

▶대학에서 ‘다시 시작하는 피아노 레슨’ 강의를 진행했다. 수강생은 음대생이 아닌 비전공생으로 제한되었는데, 학생 중 대부분은 어릴 적 피아노 학원의 문턱은 넘었지만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거나, 학업 등의 이유로 중도에 그만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빛바랜 의욕에 생기를 불러일으키고, 뻑뻑한 손가락 관절에 부드러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 선생으로서 나의 역할이었다.

수강신청의 이유를 물으니 가지각색이다.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만 해도, 수많은 여학생들이 꿈꾸는 장래 희망이 ‘피아니스트’였다고 한다. 남학생들은 현재 혹은 장래의 여자친구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장면을 꿈꾼다. 못다 핀 꿈과 활짝 피어야 할 사랑을 뜨겁게 응원하는 것 역시 선생으로서 나의 역할이었다.

학생들의 스펙트럼은 퍽 다양했다. 낮은 음자리표를 수월히 읽지 못해 모든 음표에 한글로 일일이 토를 다는 학생부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꿈꾸는 학생에 이르기까지 애초에 각자가 갖고 있는 그릇의 크기부터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니 학생들은 첫 시간부터 평가기준에 대한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출발선이 각기 다른 학생들을 천편일률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수업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릇의 크기보다는 그릇에 담기는 내용이다.”

수업은 ‘마스터 클래스’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형 강의실에 덩그러니 그랜드 피아노 하나, 공개레슨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선생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밀실’의 강습을 기대했던 학생들은 광장으로 내몰리는 갑작스러운 노출에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전문 연주자라해도 연습실 안에서 충분한 유예기간을 거쳐 무대 위로 오르기 마련이다. 무대는 자신의 치부가 가장 적나라하게 공개되는 야멸찬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수업의 학생들은 악보를 떠듬떠듬 읽는 초견부터 청중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게다가 언제 어느 때 자신의 이름이 불릴지 몰라 전천후 긴장상태였다. 열악한 강의환경을 극복하고 25명의 집중력을 3시간 동안 놓치지 않기 위한 교수자의 자구책이었다. 그러니 학생들은 종종 협심증을 호소했다. 벌렁벌렁한 심장의 과부하를 모르지 않던 교수자는 마치 강철 심장이나 가진 듯 이렇게 큰소리쳤다. “창피하기 싫으면 담력을 기르라. 담력을 기르려면 연습하라. 호신술이 물리적인 용맹함을 단련한다면, 이 수업은 정신적인 용맹함을 터득해 줄 것이다.”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완성된 연주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곡목은 ‘쇼팽의 즉흥환상곡’과 ‘드뷔시의 아라베스크’였다. 선생 한 사람이 이끌며 똑같은 피아노로 연주하는데도, 각기 다른 음색의 다채로운 해석이 만발한다. 그리고 학기 말쯤 되면, 학생들의 용맹함은 무슨 짓을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객석에서 비판의 귓바퀴를 쫑긋 세워야 할 청중들이 어느새 서로의 허물과 상처를 이해하는 친밀한 동료가 되어버린 덕택이었다. 자신의 연주를 비판적으로 단단히 진화시키기 위해선 다른 사람의 연주를 열린 자세로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생존능력을 전수하고자 했던 강의자는 그 따뜻한 광경에 뿌듯함과 행복을 느꼈다.

조은아 | 피아니스트·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4월 27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