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욕과 무관심, 성적 타락과 도덕적 타락으로 온 세상이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대학주보|2014.03.24] 이삼출 교수 칼럼
[고전의 사계] 근대의 황무지에 핀 저주의 꽃, 《황무지》
▶ “이리 오라, 내 한 줌 먼지 속 죽음을 보여주리니.”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1922년, 시월을 맞아 때마침 불어온 음습한 바람 속에 세상 모든 것에 지독한 저주를 퍼붓는 음울한 시가 런던에서 발표됐다.
시인은 34살의 미국산 토머스 스턴 엘리엇(Thomas Stern Eliot). 움푹 들어간 눈 밑의 다크 써클이 얇은 입술까지 쳐진 가냘픈 체구의 은행원이었다.
문명의 가장 추악한 것들에 냉소를 섞어 비판한 이 시는 서구문명 전체의 정수를 담은 현대의 고전으로 추앙받게 된다. 여러 정치적 문화적 사정이 개입한 결과이겠지만 《황무지》(The Waste La nd)가 이처럼 높게 평가되는 것은 작품 자체가 서구 문화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당대 모더니즘의 실험적인 형식을 통해 당시에 팽배했던 타락한 물질문명과 도덕에 대한 신랄한 고발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20세기 초 서구문단에는 이미 타성에 젖어버린 부르주아 미학을 비판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자”는 모더니즘 미학이 위세를 떨쳤다. 20세기 이후 현대 예술이 기존에 형성된 예술관습을 파괴하고 새로운 소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시하는 전위예술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는 모더니즘의 이러한 노력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5부에 걸쳐 전체 434행에 이르는 《황무지》는 한 줄도 빠짐없이 이런 모더니즘의 형식적 실험을 고스란히 구현한다.
예언에서부터 풍자와 비아냥에 이르는 어조가 일정한 구조 없이 자유로이 뒤섞이며, 독일어, 영어, 산스크리트어까지 갖가지 외국어가 동원되고, 고대 그리스의 고답적인 비극에서부터 근대 대중가요의 가사에 이르기까지 귀천불문의 온갖 장르의 문학작품에 대한 암시와 인유가 가득하다.
하지만 온갖 종류의 글과 다양한 언어가 혼재하고 이들을 통제하거나 걸러주는 고정된 화자가 없는 이 전위적인 형식이 단순히 실험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어지러운 형식은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 온갖 부류의 인간군상과 호젓한 카페에서부터 메마른 황무지, 어지러운 술집, 혼자 사는 여인의 아파트, 그리고 심지어는 귀부인의 침실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배경에서 펼쳐지는 인간 타락의 갖가지 막장드라마를 담아내는 데 가장 적합해 보인다. 합리성과 과학 그리고 이에 근거한 진보에 대한 확신과 인간에 대한 무한 신뢰로 시작된 근대의 기획은 제국주의의 시기와 일치하는 정점에 이르러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탐욕과 무관심, 성적 타락과 도덕적 타락으로 온 세상이 정신적 불모지인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이 황무지를 지배하는 것은 혼돈과 절망이다. 《황무지》가 보여주는 황무지는 이런 곳이다.
실험적인 형식과 현실비판의 내용은 현대예술에서라면 이제 흔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황무지》는 이런 흔한 작품들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작품성을 자랑한다. 이런 최상의 글쓰기는 엘리엇의 글솜씨가 여느 작가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학이 황무지로 변했다고 한다. ‘어디선가 방울져 떨어지는 물소리는 들리지만 어디서건 물 한 모금 구할 수 없는 방랑자가 되어 불모의 땅을 헤메고 있다’는 것이다. 《황무지》를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사월이 잔인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도 있고 엘리엇의 음악에 취해볼 수도 있다. 황무지에 비를 내릴 희망을 찾을 수도 있다. 엘리엇이 찾는 비구름이 동양에서 흘러들어오는 것이라는 점이 조금 맘에 걸리기는 하지만.
이삼출,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4년 3월 17일자 대학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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