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데거는 현상학적‘방법’에 입각해 이를 해체하고자 했다
[대학주보|2014.05.26] 서동은 교수 칼럼
[고전의 사계] 서양 존재론의 해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어느 날 부시맨들이 사는 마을에 하늘에서 콜라병이 떨어졌다. 난생 처음 콜라병을 본 부시맨들은 콜라병을 장난감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밀가루 반죽 밀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때로는 어떤 것을 두들기거나 고정시키는 망치의 용도로 쓰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콜라병을 찾는 수요가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고, 서로 먼저 사용하려는 부족 구성원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마침내 족장은 회의를 소집해서 다툼을 야기시킨 콜라병을 버리기로 결정한다.
이 이야기는 영화 <부시맨(God Must Be Crazy)>에 나오는 이야기의 일부이다. 이 영화에는 콜라병을 여러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부시맨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이 잘 나타나 있다. 부시맨들이 보여주는 콜라병의 용도성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이해하는 데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특정한 도구 연관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도구 연관의 세계란 주변의 사물들을 자신의 삶과 연관해 파악하는 세계를 뜻한다. 이 점에서 보면 로크의 주장처럼 인간은 백지 상태에서 출발해서 차츰 경험을 쌓아가는 존재자가 아니라, 이미 어떤 선입견을 갖고 주변의 것들을 자신의 관심에 입각해 ‘어떤 것으로서’ 이해하며 살아가는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자이다.
부시맨이 콜라병을 자신의 삶과 연관시켜 이리저리 궁리하며 새로운 용도를 발견해 내듯이 우리는 매순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자신만의 삶의 용도성에 맞게 적용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들은 매순간 질문한다. 이것이 무엇일까? 저것은 무슨 용도로 사용되는 것일까? 질문과 동시에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새로운 물건을 비교하고 유추한다.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하려면, 현재 보고 있는 사물의 용도와 관련해 기존의 경험이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미래적 관심이 있어야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주변 사물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하면서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이다.
서양사상가들은 자주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무엇으로 구성돼 있을까? 우주는 언제부터 존재했던 것일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형상과 질료, 본질과 현상이라고 하는 구도 속에서 제기돼온 서양 사상가들의 주된 물음들이었다. 이런 질문들이 서구 형이상학을 가능하게 했고,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의 과정에서 인식론과 과학이 발전됐다. 서양 근대의 과학혁명도 이러한 질문과 대답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구체적인 도구 연관의 세계가 근대 과학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서양 존재론의 역사에서 망각돼 있다고 봤다. 이 도구연관의 세계는 곧 존재의 세계이며, 영속성이 아니라 시간성 가운데서만 파악될 수 있는 세계이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방법’에 입각해 이를 해체하고자 시도했다.
지젝과 바디우는 물론이고 데리다, 라캉, 들뢰즈의 사상은 하이데거 사상과의 연관성 없이는 제대로 이해되기 힘들다. 이 사상가들은 하이데거와 유사하게 영원성에 입각한 서구의 전통적인 존재론을 해체하고, 변화와 가능성에 중심을 둔 새로운 존재론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해체란 존재론적 차이에 입각해 그 차이를 부각함으로써 서양 근대문명이 갖고 있는 본질적 의미와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해체 작업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 서양의 세계관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가능해졌다. 그의 새로운 시선은 오늘 우리에게도 ‘다르게 묻고 다르게 생각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서동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4년 5월 26일자 대학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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