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주보|2014.09.15] 문영희 교수 칼럼
[고전의 사계] 비탈에 선 청춘 : 황순원, ≪나무들 비탈에 서다≫
▶ 군대 내 가혹행위가 상상의 수준을 넘어설 만큼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다. 군인은 국가의 안위를 위해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신체적 자유와 정신적 성숙의 중요한 시간을 한시적으로 저당 잡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가 혹은 군대는 수많은 군인들을,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관심’과 ‘보호’와 ‘교정’의 대상으로 삼는다. 질서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공할 폭력행위를 묵인하거나 방치한다. 청년들은 지금 불안하고 암담하다.
“우리는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황순원의 장편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동호가 현태에게 한 말이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휴전협정이 성사되기 직전, 마지막 격전지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른 군인들과, 휴전 후 일상으로 돌아와 전쟁후유증을 겪으며 방황하지 않을 수 없는, 지금보다도 더 많이 ‘아픈 청춘’들에 대한 보고서다.
‘자연(전쟁) 상태에서 만인은 만인에게 늑대’라 한 홉스의 말처럼, 작품 속의 군인들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들 모두는 전쟁이 낳은, 상처받은 영혼이자 문제적 개인이다.
선우 상사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가족 모두가 인민군에게 몰살당하는 참화를 겪은 후 복수심에 불타 그 행위에 가담했던 부역자를 총살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다 미쳐버린다.
현태는 용맹한 군인의 전형이다. 포화 속에서 나약한 동료를 구하고, 부상을 입으면서도 인민군을 처단한다. 임무완수를 위해 작전에 방해 되는, 무고한 여인과 어린아이도 서슴없이 살해하는 역을 자청한다.
그러나 군인의 임무로 당연시하며 수행했던 민간인 살해행위는, 제대 후 일상의 삶을 살면서 지속적인 회한에 사로잡히게 하는 덫이 된다. ‘무고한 여인을 죽여야만 했던가?’ 하는 반성적 회의에 빠져 정상적인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방황의 나날을 보내는 그는 ‘곰의 잠’으로 가사 죽음 상태로 자학하거나 술에 찌든 피폐한 생활을 지속한다. 그리고 궁극에는 형무소에 수감됨으로써 속죄하려 한다.
동호는 군대문화의 타락상에 물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혐오하다 스스로를 처벌, 자살하고 만다. 동호와의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 하나만 믿고 기다린 숙이는 동호의 어이없는 자살행위, 현태의 무책임한 행위 등에 크나큰 배신감과 좌절을 맛보지만 끝까지 삶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황순원은 작품을 통해 1953년 한국의 전후 상황을 은유하여 ‘비탈’로, 그 척박한 비탈에서 어떻게든 굴러떨어지지 않아야만 하는 아픈 청춘을 ‘나무’로 묘사한다. 비틀거리는 현실, 산비탈이라 할지라도 나무는 뿌리를 내려야 한다. 어떻게? 성찰과 반성으로, ‘곰의 잠’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나’ 두 발로 단단히 현실을 붙들고 이상은 높은 곳에,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과 희망을 사념할 수 있도록. 얼마 전 먼 곳에서 꿈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신 손님이 청년에게 준 선물 역시 인간에 대한 존엄과 희망이었다. "잠들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기뻐하거나, 춤추거나, 환호할 수 없다"고 강조한 그분의 말씀과 ‘곰의 잠’을 자는 현태를 통해 우울증에 빠진 청춘을 그려내어 독자를 각성시키는 작가의 전언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묘하게 연결된다. 우리가 고전을, 먼 곳에서 온 손님처럼 환대해야 하는 이유는 왜? 라는 질문과 생각을 통해 인간의 존엄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문영희,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4년 9월 22일자 대학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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