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1770~1831)은 노동을 인간의 보편적 의식으로 규정했다
[대학주보|2013.10.07] 우기동 교수 칼럼
[고전의 사계] ‘시대정신’의 정초, 헤겔의 《정신현상학》
▶ 헤겔의 철학은 관념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란 이념이 스스로 전개돼 점차 더 완전한 사회상태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념이 자기 전개하는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진보과정이다. 이때 자유는 정신의 본질로 규정되기 때문에, 역사는 세계정신이 자유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헤겔은 ‘이성의 간지(奸智) List der Vernunft’라는 사변적 범주를 도입한다. 이성의 간지란 세계정신이 개인을 이용해 역사를 발전시키는 힘의 역할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세계정신은 때로는 역사적 위인을, 때로는 연약한 개인을 등장시켜 ‘시대정신이라는 역사적 필연성’을 체현한다. 말하자면 이성의 간지라는 개념은 인간의 열정, 관심사, 행위 등을 이용해 역사적 필연성을 관철시키는 초개인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정신과 이념을 전제하고 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이성과 정신을 확립하는 ‘의식의 경험의 학’이다. 의식은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감성적 확신, 지각, 오성, 자기의식, 이성, 정신으로 발전한다. 이렇게 확립된 정신은 앞에서 언급한 역사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중심 개념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헤겔철학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토대라 할 수 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노동 개념이다. 헤겔은 최초로 노동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 노동을 바탕으로 근대의 시대정신을 형상화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는 《정신현상학》<자기의식>장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헤겔에 의하면 자의식은 자신의 자립성을 견지하는 주체적 자아이며, 자신의 내부를 성찰하는 반성적 자아다. 헤겔은 이 자의식을 욕망으로, 그것도 타인에 대해 스스로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정에 대한 욕망으로 간주한다. 욕망으로서의 자의식은 스스로의 자립성을 확신하는 개별적 자아이지만, 그 자립성은 다른 자의식의 인정에 의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의 자립성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두 자의식간에 현실적인 인정투쟁이 벌어진다. 헤겔은 인정투쟁에서 자립성을 확립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수하여 승리한 의식을 주인의식이라 명명하고, 죽음이 두려워 굴복한 의식을 노예의식이라고 명명한다. 인정투쟁에서 패배한 노예는 살려 준 대가로 주인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노예는 노동을 매개로 자연에 관계하면서 주인의 생활을 떠맡는다. 그래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향유와 노동의 예속적 관계로 나타난다. 그런데 노예는 노동 과정 속에서 자립적 의식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대상을 가공하고 변형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변화시킨다. 대상을 합목적적으로 변형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때, 노예는 진정으로 자신의 능력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헤겔의 시대정신과 역사적 필연성에 근거할 때,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연의 필연성과 법칙성을 인식함으로써, 자유를 실현하는 진정한 자립적인 주체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헤겔은 인정투쟁을 통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동이야말로 내세의 모든 허구적 관념을 거부하고, 현실 세계를 형성하는 원천임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은 이제 자연과 인간을 매개하는 중심으로서,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핵심 계기로서 자유를 실현하는 철학적 의미를 획득하게 됐다. 결국 헤겔은 노동하는 의식을 인간의 보편적 의식으로 승화시켜 ‘나인 우리, 우리인 나’의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논의하고, 그러한 삶 속에서 자유를 실현하는 시대정신을 알려 주고 있다.
우기동,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3년 10월 7일자 대학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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