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주보|2013.11.25] 김동건 교수 칼럼
[고전의 사계] ‘사람’들의 이야기, 《삼국유사(三國遺事)》
▶ 《삼국유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한국 고대사의 양대문헌’으로 불린다. 이런 거창한 수식어와 함께 《삼국유사》는 ‘지루한 역사서’라는 다소 억울한 오해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실은,《삼국유사》는 재미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일본에 가서 해와 달의 신이 됐다는 연오랑과 세오녀, 임금님의 비밀을 간직한 복두장이의 마지막 외침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서동과 선화공주의 비밀스러운 사랑, 울보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등 여러분이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재미난 옛날 이야기들이 모두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군신화도 바로 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얼마 전, 우리는 하늘[天] 열린[開] 날, 개천절(開天節)을 기념했다.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 할아버지가 고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날이라고 하는데, 기원전 2333년 전 일이라고 하니 날짜는 물론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천신의 아들 환웅과 곰 여자 웅녀 사이에서 난 자식이 단군 할아버지라는 기록 또한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허황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이 이야기를 근거로 우리 민족의 시원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시원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일연(一然) 스님의 계획이었으며, 단군신화를 《삼국유사》 맨 처음에 둔 것은 일연 스님이 그러한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일연(一然) 스님이 《삼국유사》를 찬술했던 13세기는 고려가 무신정권의 혼란과 몽고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일연 스님은 이 고난과 위기의 시기에 《삼국유사》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다. 책 한 권에 민족적 자존심 따위가 그리 쉽게 고양될 리 만무하다.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과거 역사를 통해 민족적 우월성을 확인하려는 태도는 ‘지금은 이 꼴이지만 원래는 우리 집 잘나갔었어’라는 다소 유치한 발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서사적 존재다. 과거의 무수한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면, 그리하여 과거의 무수한 시간과 지금의 내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라면, 과거를 아는 일은 곧 나를 아는 일일 것이다. 요컨대,《삼국유사》는 ‘나’에 대한 이야기이며, 나와 같은 피를 나누어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유사(遺事)’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국유사》는 ‘후세에 전할 만한 일’을 모아 놓은, 사건 중심의 기록이며 그 사건의 중심에는 사람들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이념이나 시대라는 틀 속에 갇혀 박제화된 존재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북만 한 똥을 누는 왕비를 아내로 맞은 지철로왕은 국가적 업적을 남겨야 하는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성적 욕망과 성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구체적 개인이다. 그런가 하면, 여자아이의 놀이를 하고 비단주머니를 차고 다녔던 왕도 있다. 본래 딸이었으나 아버지 경덕왕이 후사를 위해 아들로 바꿔 달라 소원하여 태어난 혜공왕은 지금으로 치면 트렌스젠더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남자를 배필로 선택한 평강공주와 선화공주는 ‘공주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가난에 못 이겨 자식을 땅에 묻으려 했던 손순의 이야기는 지금으로 치면 생활고를 비관한 동반 자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대가 좋아졌다고는 하나 가난한 사람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삼국유사》는 바로 지금의 이야기다.
《삼국유사》를 읽다보면 시간을 초월해 살아 있는 낱낱의 삶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삼국유사》가 역사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중요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김동건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3년 11월 25일자 대학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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