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은 우리가 잃어버린 삶에 대한 연대의식을 고향으로부터 호출해내고자 한다
[대학주보|2013.12.02] 이선이 교수 칼럼
[고전의 사계] ‘반문명’의 발견, 《백석전집》
▶ 《백석(白石, 1912-1995)은 문명화의 기치 아래 인간의 본성이 망각돼 가는 식민지 근대를 목도하며, 이에 대한 저항을 시적 전략으로 삼은 시인이다. 일본 유학을 통해 영문학을 공부했고 한때 영어교사를 한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석은 서구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전형적 근대지식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력과는 달리 그는 문명화 담론이 사회의 주류 담론이 됐던 이 시기에 토속적인 반문명의 세계로 그의 시적 촉수를 돌려놓았다. ‘반문명의 발견’이라 명명할 수 있는 이 기획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시적 성찰과 결부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근대의 지층에 서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있다.
백석은 토속신앙을 토대로 친족적 유대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던 유년의 기억을 통해 공동체적 가치가 살아있는 고향을 시적으로 재현한다. 여기서 고향은 멧돼지와 이웃사촌으로 지내고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야성적 생명력이 넘치는 공간이다. 시인은 이들 낱낱의 존재를 시적으로 호명하는 과정에서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구성원 사이에 강한 유대의식을 부여한다. 이 공간에서는 신분과 나이의 구분이나 직업적 귀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짐승마저도 대등한 존재로서 삶에 참여한다.
그렇다면 문명과는 거리를 둔 이 같은 반문명적 공간의 시적 재현을 통해 시인은 어떤 삶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가 그려낸 고향에는 삶에 대한 일종의 거룩함이 깊게 배어 있다.
백석의 시세계가 뿜어내는 이 거룩함의 아우라(Aura)는 단절과 고립의 삶을 내면화한 근대적 고독감과 대립항을 이루고 있는데, 그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삶에 대한 연대의식을 고향으로부터 호출해내고자 한다. 이 유토피아에 대한 미학적 열망이야말로, 시인이 파편화돼 가는 근대적 삶의 질서 안에 재각인하고 싶었던 ‘오래된 미래’라 하겠다.
한편, 백석의 시세계에서 공동체적 연대감은 인간의 본성에서 발원하는 근원적 윤리의식과 연관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그의 시적 화자들은 힘없고 가난한 존재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도처에서 드러낸다. 이러한 연민은 비단 인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찮은 미물의 삶에까지 파고든다. 이는 추운 밤 방바닥에 내린 작은 거미새끼를 문밖으로 쓸어버린 후 화자가 느끼는 자책감을 그린 시 《수라(修羅)》에서 한 절정을 보여준다. 유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은 인간의 윤리적 본성이라 할 수 있는데, 시인은 이를 예리하게 포착해냄으로써 타자의 슬픔에 공감하는 윤리적 열림의 경험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백석의 시세계가 자아내는 슬픔의 정서도 결국 이러한 윤리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시편들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에 정서적으로 동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이 과정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 있는 일종의 윤리의식을 일깨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가 도저한 슬픔의 정서를 주조음(主調音)으로 삼고 있는 것은,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인간의 본원적 윤리의식으로부터 그의 시정신이 발원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삶의 유기적 질서가 파괴되고 인간적 연대의 고리가 끊어지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온전한 삶의 형식이란 어떠해야 하며 인간의 참모습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가는 사유의 모색 과정에서 《백석전집》은 은유와 상징으로 제작된 좋은 나침반이자 훌륭한 지도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선이 한국어학과 교수
2013년 12월 2일자 대학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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