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슈비츠는 우리가 만든 현대문명의 지울 수 없는 원죄의 경험이다
[대학주보|2014.01.06] 김진해 교수 칼럼
[고전의 사계] 안녕 걱정하는 시대에 던지는 질문, 《이것이 인간인가》
▶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것은 ‘기억’이다. 나는 기억이다. 습관, 목도리, 가방, 손수건, 소중한 사람의 사진 등 가장 가난한 거지조차 간직하고 있을 소지품들 속에는 각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일부분이고 우리의 팔다리다.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뺏겨버린 사람을 상상해보라. 내 모든 것이 남김없이 누군가에게 몰수된다면?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고 벗겨져 바닥에 내팽개쳐진다면? 그는 고통과 욕구만 남은, 텅 빈 인간이 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 이것이 인간인가.
저자 프리모 레비는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다. 그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반파시즘 저항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이송당해 노예와 같은 삶을 살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작가이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희생자의 수는 110만~150만, 그 외의 수용소 등에서 학살된 자를 합친 총수는 600만명. 1945년 수용소가 해방될 때 살아있던 수인 중 5만8천명은 퇴각하는 독일군에 의해 대부분 목숨을 잃고, 구제된 사람은 7천명에 불과했다.
이 책은 10개월에 걸친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을 기록했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성이란 것이 얼마나 얄팍한지 보여주는 안내판이자, 현대인이 자랑하는 이성과 문명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새겨놓은 문신이다. 아우슈비츠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수용소가 비이성적인 몰상식과 야만적 괴물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리어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인간이라면 그렇게까지 할 리가 없다’는 믿음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수도 있다’는 자기혐오를 낳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성을 땅에 파묻고, 인간을 동물로 만드는 작업을 완성하고 실행할 수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하나의 사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시절의 경험은 우리가 만든 현대문명의 지울 수 없는 원죄의 경험이다.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 수인들의 생존을 향한 몸부림을 그리면서 던진 ‘이것이 인간인가’라며 질문은 수용소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자와 그러지 못한 자를 향하기도 하고, 수용소라는 배제의 공간을 발명한 독일인을 향하기도 하고, 그것을 용인한 현대문명을 향하기도 한다.
레비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분노나 고발보다는, 기억과 증언의 자세를 유지한다. 우리가 서로 동시대인일 수 있는 것은 기억과 증언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이다. 공동의 기억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다른’ 사람들을 거기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를 사로잡아야 우리는 서로 연결된다.
그렇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가능했던 것도 평범한 독일인의 무관심과 무지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수용소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공기가 숨차다. 개인은 모두 자기 앞가림하기에 바쁘다. 연민의 감각은 무뎌졌다. 세계는 삼류 무림의 이단옆차기가 난무하다.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의 경계가 너무나 뚜렷하다. 우리는 도처에서 배제의 기술을 익히고, 희생양을 찾고, 게토를 만든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한톨의 방황도 허락지 않는다. 한번 밀리면 끝이다. 공동의 기억은 사라지고 각자도생의 분투기만 넘친다. 결국 우리가 도달할 곳은 배부른 노예의 섬.
우리에게 세상을 바꿀 아무런 힘이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그 능력은 바로 이 세계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인드라망의 그물코를 온전히 실현시킬 수는 없지만, 다른 세상을 향해 노력하는 것, 그게 인간의 길 아닌가. 안녕한 당신, 생각해 보라. 나의 평화가, 나의 안위가, 나의 행복이 무관심과 무지라는 울타리 속에서 피어난 것이라면, ‘이것이 인간인가.’
김진해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4년 1월 6일자 대학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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