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8년 말, 영국 린네학회의 회장 토머스 벨은 그 해의 학회 활동을 이렇게 결산했다. “정말이지 올해는… 과학 분야를 혁명적으로 바꿔 놓을 만한 놀라운 발견이 전혀 없었다.” 학회에서 발표됐지만, 학회장으로부터 괄시받은 논문 중에는 찰스 다윈과 알프레드 월리스가 함께 쓴 자연 선택에 대한 논문도 있었다. 인류의 지성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혁명을 일으킨 과학 이론치고는 꽤 소박한 대접을 받으며 등장한 셈이다.
다윈은 이듬해 《종의 기원》을 출판했다.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을 담은 책이었다. 당대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열광적인 찬사와 원색적인 비난, 암울한 절망이 잇따랐다.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다윈의 혁명적인 발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후벼 판다. 사이비 과학의 대표격인 창조과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진화론이 헛소리며 이미 기각됐다고 외친다. 다른 이들은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라 히틀러의 인종주의 같은 위험한 교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진화론에 무덤덤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왜 다윈의 발상은 문자 그대로 혁명인가? 만약 여러분이 진화는 생물학을 전공하는 과학자들에게만 중요하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진화는 화석이나 공룡, 혹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설명하는데 유용하다. 하지만 진화는 그 이상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진화 이론을 거부하는 까닭은 지난 수천 년간 인류가 소중하게 간직해온 세계관이 다윈에 의해 송두리째 전복됐기 때문이다.
철학자 다니엘 데닛에 따르면, 다윈 이전의 세계관은 “복잡한 것은 그보다 더 복잡한 것에서 나온다”였다. 칼은 그보다 더 복잡한 대장장이에서 나온다. 칼이 대장장이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아이폰이 스티브 잡스를 만들 수는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이 원리에 비추어보면, 인간의 복잡한 정신세계-예컨대 이성, 도덕, 아름다움, 문화, 그리고 삶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무엇, 즉 기성 종교의 인격신이나 범신론적인 자연 섭리에서 나왔음이 확실하다.
발칙하게도 다윈은 이 세계관을 거꾸로 뒤집었다. 그는 “복잡한 것은 단순한 것으로부터 생길 수 있다”고 단언했다. 바보 같은 소리! 칼이 대장장이를 만들었다고? 아이폰이 잡스를 만들었다고? 칼이나 아이폰처럼 인공물의 복잡한 설계는 물론 인간이 만들었다. 하지만 생명계에 존재하는 복잡한 설계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설계자, 곧 신이 만든 작품이 아니다. 눈이나 심장, 허파처럼 복잡한 생물학적 적응은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만들어졌다. 다른 그 어떤 과정도 생명의 복잡한 설계를 만들 수 없다. 오직 자연 선택만이 할 수 있다.
《종의 기원》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책이다. 삶의 의미나 윤리 같은 정신 영역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대자연의 섭리나 인격신으로부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유전적 변이 가운데 조금이라도 다음 세대에 더 잘 전파되는 변이를 골라내는 자연 선택으로 서서히 진화했다는 함의를 던지기 때문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인격신이나 범신론을 믿는 다윈 이전의 비과학적인 상태로 회귀하든지, 아니면 삶의 의미나 목적은 맹목적인 자연 선택이 누적되어 최근에야 만들어진 결과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자연과학의 성과를 겉으론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역사, 문화, 윤리, 종교에 관한 탐구에 다윈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는 태도는 오래전 도래한 다윈 혁명에 여전히 무지한 격이다.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은 심적 세계와 물질세계를,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해주는 토대이다. 올해부터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진화의 렌즈로 법학, 공학, 경제학, 심리학, 인류학 등 기존 분야를 새롭게 조망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진화와 인간행동’ 자유이수 교과 프로그램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전중환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3년 4월 7일자 대학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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