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티끌 같은 삶.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대학주보|2015.01.29] 김연숙 교수 칼럼
[고전의 사계] 수많은 사람들의 광대한 인간서사, 《토지》
▶ 누가 나에게 <토지>가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겁나……”
<토지>는 겁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겁나 많이 지지고, 볶고, 물고, 뜯고, 죽고…… 그 와중에 또 겁나 많이 사랑하고, 헤어지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런 이야기다. 만약 질문한 이가 내게 장난하냐고 눈을 흘기면, 정색을 하고 다시 말할 터이다. 경남 하동 평사리의 지주집 최참판댁이 몰락하고 나서, 무남독녀인 서희가 빼앗긴 재산을 되찾고 다시 집안을 일으킨 이야기라고. 그러나 분명 나는 금세 돌아서서 이렇게 중얼거릴 거다. 그건 줄거리가 아니야, 이야기는 ‘겁나’ 많아.
작가 박경리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원고지 4만 장 분량의 <토지>(총 20권)를 써내려갔다. 26년의 기나긴, 그야말로 대장정이었다. 작가 스스로 말하기를, 목숨이 있는 이상 자신은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수술 후,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소설을 쓰면서 나는 지금 악마에 사로잡힌 것인가라고 되묻기도 했다고 한다. 이건 무엇일까. 한 인간의 삶에서... 소설이든 뭐든 좋다, 소설도 좋고 사랑도 좋고, 일도 좋고, 놀 거리도 좋고, 뭐든 좋은데 난 이걸 안하고는 살 수 없다는, 그 어쩔 수 없음은 무엇일까. 게다가 26년이라니, 도대체 삶을 송두리째 걸만한 것은 무엇일까, 아니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진심으로 찾아본 적은 있었던가.
<토지>를 처음 읽는 독자는 아마도 ‘서희’에게 제일 먼저 눈길을 뺏길 것이다.
“찢어 죽일 테야, 말려 죽일 테야”라며 눈에서 레이저광선을 내뿜는듯한 서희. 앞서 말한 것처럼 그녀의 복수극이 <토지>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의 주인공은 그녀가 아니다.
<토지>의 진짜 주인공은 1897년부터 1945년을 무대로 삼아 등장하는 600여 명의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욕심 많은 사람, 그저 그런 사람...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어떤 때는 이 사람이 나 같고, 또 다른 때에는 저 사람이 나 같고, 이딴 사람이 다 있냐고 진저리를 치다가도 몇 권을 더 읽고 나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삶의 굴곡을 어떻게 넘어가는지, 어떻게 인간다운 가치를 지키는지 혹은 버리는지를 보여주면서 <토지>의 광대한 인간 서사가 펼쳐진다. 그와 함께 질문 하나가 독자에게 전해진다.
사람들은 각기 하나씩 자기 별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사람의 머리론 계산조차 어려운 아득한 곳에서 저 무수한 별들이 빛을 보내고 있다 하는데 한 자 낙낙한 팔이 어찌 내 별을 잡아볼 것인가. 내 앞만 쓸고 사는 티끌 같은 삶, 티끌이 바늘귀 같은 인생의 출구를 빠져나가면 광대하고 무변한 공간……티끌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꼬. (<토지>13권 중에서)
아득한 곳에서 빛나는 별을 잡을 수도 없고, 스스로 빛나는 삶을 살아가지도 못하는, 그저 티끌 같은 삶.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토지>는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고, 삶을 긍정하기 위한 이들의 고투를 보여준다. 그것은 자기 삶에 무조건 만족하는 것도, 고단한 삶을 체념하는 것도 아니다. 그 어떤 것을 만나더라도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토지>는 그렇게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 수많은 사람들의 궤적을 보여주는 ‘인간백화점’이다.
김연숙,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5년 1월 29일자 대학주보
조회 : 4,7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