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주보|2015.05.04] 유병래 교수 칼럼
[고전의 사계] 보이지 않는 문 - 도의 나들목
▶ 《도덕경》은 인생론, 사회정치론, 우주론을 변주하는 철학시(哲學詩)다.
사람들은 있음(有)만을 추구하고 없음(無)은 애써 없애버린다. 그래서 있음과 없음은 별개의 것, 모순관계가 된다. 그러나 있음과 없음이 하나의 혼재(混在)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무슨 색깔을 띠고, 무슨 소리를 낼까? 《도덕경》은 그것이 가물가물(玄)한 색깔을 띠고, 무언의 말을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만물의 온갖 묘함(본연의 상태)을 낳는 문이며, 이런 이치를 관조하는 것이 ‘밝음(明)’이라고 말한다.
《도덕경》에서는 다차원의 ‘문(門)’을 언급한다. 우주가 생겨나는 문, 인간을 포함한 천지 만물이 흘러나오는 동시에 흘러들어가는 문이 있다고 한다. 그 문은 형체가 없기에 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천지만물의 생사를 결정짓는다. 이 ‘문 아닌 문’에는 빗장이 없지만 억지를 부리면 닫혀버린다.
그것이 생활 주변의 기물에 비유된다. “문을 내고 창을 뚫어 집을 만드는데, 그 빈 곳에 집의 쓰임새가 있다. 그러므로 있게 함은 이로움이 되고 없게 함은 쓰임새가 된다.” 있게 하면서도 동시에 없게 할 때 그 이로움과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
사람에게도 문이 있다. 《도덕경》에서는 ‘자(自)’자를 수없이 사용하는 가운데 ‘자연(自然)’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자는 ‘스스로’, ‘저절로’, ‘자기’ 등을 뜻하는데, 이것이 본래 가리키는 것은 사람의 코이다. 코란 들숨과 날숨이 끊임없이 교체 순환하는 곳이다. 이 둘이 함께 있어야 하는 빈 통로가 코, 곧 ‘천문(天門)’이다.
그 천문의 존재와 작용이 의식되지 않는 채로 기능할 때 사람의 목숨, 자기성이 온전히 유지된다.
그러면 이것이 인간의 지식활동과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학문을 하는 것은 날로 더하고, 도를 추구하는 것은 날로 덜어낸다. 덜어내고 덜어내어 무위에 이르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지식을 있게 할 때 그것의 없게 함도 함께 고려해야 이로움이 있다. 없게 함이란 걷어차거나 폐기하는 게 아니라 공적 차원으로 넘어서는 것이다. 그저 많이 쌓아두는 게 아니라 들고나면서 유통하는 활성적 지식이 되어야 한다. 자유자재로 활용되는 지식은 자기도 상하지 않게 하고 남도 해치지 않는다. 있게 함과 없게 함이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유하는 지식은 지혜로 승화된다. 인류와 우주의 생존을 위한 지혜는 이런 있음과 없음의 혼재에서 가능하다.
《도덕경》의 저자로 알려진 노자는 주나라 왕실의 사관(史官) 즉 국립도서관장을 지낸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그 이전과 당시의 온갖 국내외 정보·지식·학술을 다 씹어 삼키고 소화시켜 《도덕경》을 내놓았다. 그는 세상물정의 정수만이 아니라 새롭게 우주물정에 관해서도 말한다. 그 새로운 차원의 앎을 창안하는 일은 있음을 없음과 동반시킴으로써 가능하였다.
오늘날 대학은 넘쳐나는 지식정보를 어떻게 씹어 삼키고 소화시키는가? 그런 일을 통해 다시 사회에 어떤 새로운 앎을 내놓는가?《도덕경》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새로운 차원의 공적 앎을 창안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시사점이다.
《도덕경》식으로 우주물정을 읽자면 어떤 답이 나올까? 우주가 태어나온 문을 빅뱅(Big Bang)이라 부르는 데 대해, 우주가 되돌아가는 문을 빅크런치(Big Crunch)라 불러보자. ‘빅크런치’는 대파국을 뜻하는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우주적 날숨은 동시에 우주적 들숨과 혼재한다. 창조 따로 파국 따로란 있을 수 없다. 있게 함에 자발적인 없게 함을 동참시킨다면 장구한 우주적 생명이 가능할 것이다.
들숨과 날숨이 혼재하면서 대립하지 않고 포월(包越)될 때 생명이 존속된다. 지식의 얻음과 잃음이 혼재하면서 포월될 때 삶의 지혜(明)가 영속된다.
유병래 교수
2015년 5월 4일자 대학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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