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야만의 딜레마 - 아야소피아 성당
20세기,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 관한 책을 냈다. 그리고 21세기, 하랄크 뮐러는 문명의 공존이라는 책을 통해 문명의 공존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런데 과연, 문명과 문명의 만남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 할 수 있는 것일까? 아, 이것은 내게 너무나도 어려운 질문이다. 문명 공존의 상징, 아야 소피아 박물관은 그런 점에서 내게 어느 정도 생각의 좌표를 제시해주고 있다. 그곳에는 비잔틴 양식의 성당과 이슬람 양식인 미나렛트가 서로 어울려 있으며, 예수님의 신상이 그려진 성화와 더불어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인정한다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이렇듯 결코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두 종교,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화해와 관용의 정신을 떠올리고 박물관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며
돌아가곤 한다. 소피아 박물관을 바라보며 느끼는 두 종교가 공존할 수 있다는 만족감은 마치 우리가 오늘날에야말로 다양성과 관용정신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인 것만 같다.
그런데 과연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 평화와 관용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이슬람의 나라에서 기독교의 성화를 벗겨내지 않고 단지, 회칠에 그쳤다는 사실에서, 현대인은 콘스탄티노플 공략전의 승리자인 마호메트 2세의 관용정신에 감탄한다. 그런데 과연 마호메트는 야만이 아닌 관용의 역사를 만들고 싶어서 성화를 벗겨내지 않고 회칠했던 것일까. 베버른은 유한계급론에서 권력자들이 흔히 자신의 부와 권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무용(無用)한 곳에 지출을 한다고 말했다. 마호메트 2세 역시 그까짓 성화에 도금된 금 정도야 없는 셈 쳐도 이제 막 번창하기 시작한 제국을 운영하는 데엔 오히려 조금도 부족할 게 없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단지 그가 성격이 급해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 무섭게 비잔틴 문화가 자랑하던 성당에서 이슬람식 예배를 드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때문인지 성화를 뒤덮은 회칠은 균일한 두께가 아닌 울퉁불퉁하여 급하게 바른 티가 역력하다. 마호메트 2세의 진짜 의도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카이사르의 말처럼 인간은 본디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길 좋아하는지라, 관용만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프로젝트의 목적도 문명의 충돌 현장에서 갈등이 어떻게 포용되고 변용되는지를 보는데 여행의 목적이 있었다. 또 가이드 선생님의 강의에서도, 터키에 다녀온 대부분의 관광객들도 모두들 관용을 외친다. 그런데 다들 이렇듯 천편일률적으로 관용만을 보고 있는데 문득 이것이 진짜 관용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야 소피아 박물관에서 우리는 '관용'이란 듣기 좋은 말을 떠올리며 은연중 그 사실을 발견한 자신 역시 생각이 깊은 지식인이자 관용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건축물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건축가의 철학이 반영되는 법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형상을 표현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이를 통해서 흙벽돌로 아무렇게나 지어진 것 같은 소피아성당의 볼품없는 외벽은 이러한 예수님의 겉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화려한 금박 모자이크로 한껏 멋을 낸 내부 장식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가슴에 위로와 평안을 가져다 준 예수님의 아름다운 내면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즉, 성 소피아 성당은 건물자체에 예수님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예수님 몸속에 예수님을 신으로 인정한다는 크리스트교의 십자가와,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고 신앙고백을 하는 이슬람의 현판의 공존은 아이러니하다. 물론 십자군 전쟁 때부터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골이 깊게 패인 대립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 간직한 관용은 더욱 의미 있는 상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이러니에서 모든 사람이 화해와 공존의 아름다움을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분명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화해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미래 인류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미흐랍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내게는 미흐랍이기 이전에 욕심으로 얼룩진 현대인류가 개발한 관관상품의 야만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불쑥 이런 의문이 든다. 단지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단지 지금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이 관용이고 문명이며, 파괴한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야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야 소피아 박물관’ 지금의 정식 명칭이다. 이름을 분석해 보자면 ‘아야’는 아야 소피아 모스크 시절에, ‘소피아’는 성 소피아 성당일 시절에, 박물관은 오늘날 붙이게 된 이름이다. 세 가지 이름이 동시에 불리게 된 현재, 과연 이 건축물의 정체성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
곱디고운 건물의 형체만 고이고이 간직하고, 제국의 영화를 상징하는 늠름했던 그 옛날의 기상과 정신이 그 안에 깃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건물이나 다름없다. 현대 인류가 가지고 갈 숙제도 바로 이것에 있다. 화려하여 관광 상품으로써 개발되어 큰 이문을 남길 수 있는 분야에만 투자를 하고, 볼거리는 지루하고 단조로우나 역사적의의가 큰 유물들을 관리하고 보존하는데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투자받은 유물역시 상품으로써 그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열중한다면 없느니만 못하다. 때때로 형체만 보존하고 정신은 잊어버리는 것이, 실재는 사라졌지만 역사적 교훈을 남기는 것 보다 더 큰 야만일 수도 있다. 우리가 소피아 성당을 바라보며 진정 ‘공존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잠시 사진기는 내려놓고, 종교의 이름으로 희생된 그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고 묵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제 다시 성 소피아 성당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성당으로 사용되었던 시간만큼 아야 소피아 박물관은 모스크로서도 오랜 세월 무슬림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기 때문이다. 성당의 성화들을 복구해 내기 위해 지금 그려져 있는 세밀화들을 지우고 회칠을 벗겨낸다면 이번엔 모스크 파괴라는 야만을 또다시 되풀이 하는 것이 되고 만다. 성당을 되돌아가는 것도, 모스크로 남아 있는 것도 이제는 그 어떤 선택도 야만이 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물관으로의 개관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야 했던 아야 소피아 박물관의 숙명적 비애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거대한 건축물의 위용도, 섬세한 금박 모자이크도 보고 있지 않다. 이 위대하고도 놀라운 건축물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승리자 이슬람의 관용정신을 볼 것이고, 또 누군가는 침략의 아픈 역사를 보고 지나갔으리라. 나 역시 이곳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을 꺼내어 추억하고 반추해볼 뿐이다. 문가에 세워진 주춧돌이 무겁다.
공존, 그 아름다움을 바라며.
이스탄불 여행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나무이다. 그렇다면 그 나무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유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나에게 영감을 준 나무는 토프카프 궁전에 심겨진 수많은 나무들 중 한 그루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나무가 내 시선을 끈 것은 그것의 모양 때문이었다. 나무는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종(種)의 나무가 한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모습이다.
이질적인 두 종교, 국어국문과 1학년 권성혜 문명이 만난 자리에서 싹틔운 나라, 터키. 아야 소피아 박물관보다는 이 나무가 이 나라의 정신을 보다 자애롭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무에게 있어서 버섯은 암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 조그마한 버섯조차도 암(癌)에 비유될진대 이렇게 큰 기생나무가 자신의 몸뚱이에 붙어 제 속을 다 갉아먹도록 그 나무를 품어주고 있는 형상이라니…. 마음이 짠해온다.
서쪽 끝과 동쪽 끝이 만나는 지점,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던가. 동양이 끝나는 곳에서 서양이 시작되고 서양이 끝나는 곳에 동양이 있다. 바다위의 모래알처럼 많은 상인들이 장구한 역사 이래 파도에 쏠려 왔다가 또 그렇게 떠나갔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에서 이슬람권으로 대치된 거대한 문명 중심으로 이스탄불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나무에게도 문명의 교체가 그리도 대단한 문제일까?
무수한 세월, 세대를 거듭하며 실크로드의 중심지이자 세계의 만물상으로 기억된 이스탄불. 제국을 다스리는 사람이 황제이든, 술탄이든, 시민이든 이스탄불은 영원히 이스탄불 일 것이다. 이스탄불을 표현하는데 무슨 다른 수식어가 필요할까 만은 내가 본 이스탄불은 마블링 그 자체이다. 도통 섞이지 않는 재료들이 한 데 어울러져 하나의 작품이 되는 그런 도시! 여기가 이스탄불이기에 술탄의 궁전 한 가운데 놓인 그런 기형적인 나무 역시 용납됐으리라.
자신을 ‘유럽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가 인터뷰한 터키인 대부분은 ‘둘 다’를 선택했다. 우문현답이었다. 이분법적인 선택을 강요한 순간 그들은 어느 쪽에도 자신의 적을 새기지 않았다. 세계문명의 교차로에 선 사람들답게 고정된 정체성을 갖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 이들의 정체성인 것이다. 유럽인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아시아인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터키인들은 그냥 터키쉬다!
화무십일홍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마찬가지로 과거에 찬란한 영화를 자랑하던 국가 역시 쇠퇴일로를 걷게 된다. 팍스로마나를 자랑하던 로마도, 헬레니즘 문화를 구현한 알렉산더제국도 어느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책에서나 그들을 추억할 뿐이다. 이것은 돌고 도는 역사의 숙명적 비애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운명을 감당해야할 지도자에게 있어서는 망국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만큼 잔인한 일도 없을 것이다.
국가의 망운이 드리웠음을 깨닫는 순간, 지도자들은 망국의 책임이 자신의 업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발버둥 친다. 그래서일까. 돌마바흐체 궁전을 바라볼 때에 나는 바람 앞에 놓인 등불 신세가 된 제국의 말로를 막기 위해 발악하던 술탄 압둘 마지드의 비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이 마주보고 있는 보스포러스 해협, 돌마바흐체 궁전은 유럽 쪽 이스탄불에 자리 잡고 있다. 유럽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큼이나 유럽을 닮고 싶고, 유럽에 지고 싶지 않았던 술탄 압둘 마지드는 터키 속의 프랑스를 구현하였다. 베르샤유 궁전을 모방하였지만 그보다 더 크고 화려한 궁전을 만들기 위해 건물에는 총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고, 내부는 샹들리에 36개, 크리스털 촛대 58개, 명화 60여 점, 시계 156개, 화병 280개 등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이러한 화려한 장식 뒤에 숨겨진 이슬람 최대 지도자 술탄의 두려움이 보였다. 4.5톤짜리로 반짝이며 흔들리는 샹들리에는 육중한 역사의 무게를 감당해야했던 그의 다부진 눈동자가 찬찬히 흔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이때, 대한제국을 천명하던 고종황제가 겹쳐 보였던 것은 왜일까. 전통군대인 예니체리 부대를 해산시키고 서양식 군제를 도입하였으며, 돌마바흐체 궁전 같은 서양을 본뜬 궁전으로 실상 쓰러져가는 제국의 건재함을 과시하던 후기 오스만제국. 그리고 불타버린 경복궁을 재건하고, 서양식 건물을 짓고, 그들의 군제를 도입하며 광무개혁을 단행했던 조선 말기의 모습은 어딘가 닮아 보인다. 서구 제국주의가 손을 뻗치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국운을 건 선택을 해야 했다는 점이 그렇고, 두 왕조 모두 동도서기적 기치를 내세워 왕권강화 중심의 서양식 문물을 도입했다는 점도 그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국가의 운명은 똑같이 눈을 감고야 만다. 터키와 우리나라가 간직한 고유한 역사와 그 고고했던 정신적 문화유산마저도 이때부터 제국주의와 서구식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절하 되었다. 제국의 몰락은 백성들의 자존감을 상실로 이어졌고 자기역사에 대한 우울한 트라우마 마저 남겼다.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오르한 파묵은 이러 듯 자괴감에 빠진 이스탄불의 음울한 영혼을 탐색해 가는 과정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이스탄불』중 옮긴이의 말에 보면 파묵이 자주 쓴 터키어에는 hüzün이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우울함, 비애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나라의 한(恨)과도 닮아 있다고 역자는 소개한다. 터키의 역사는 북쪽으로는 슬라브와 유목민족이, 남쪽으론 이집트 문명이, 동쪽에는 페르시아가, 그리고 서쪽으로는 로마에 둘러 싸여 있는 곳에서 움텄다. 휘몰아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대 문명들의 교차로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터키인들의 느끼고 있을 hüzün이 결코 가벼운 단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고의 세월이 한(恨)에 응축되듯 영화롭던 제국의 향수 역시 hüzün안에 녹아 있다. 그러고 보니 일정한 한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나라와 터키를 동기(同氣)간으로 이어주는 듯하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터키는 이제 지난날의 트라우마를 거의 씻은 듯 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스탄불을 가리켜 '인류문명의 살아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 했는데, 이젠 굳이 토인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스탄불 주민들 스스로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찬란한 문화유산, 유형유산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후대인들이 자긍심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돌마바흐체는 바다를 메워서 간척한 곳에 세웠다. 그리하여 돌마바흐체의 뜻도 ‘가득 찬 정원’이라는 뜻이란다. 도대체 무엇이 가득 채워졌으며 무엇이 비어있단 말인가.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백성들의 모습은 대동소이하다. 백성들은 새벽을 깨우고 밤잠을 쫒아가며 간척지로 나아간다. 늙은이들은 조금이라도 매를 덜 맞으며 고된 노역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젊은이들에게 알려주나, 어깨에 올려 진 바윗돌은 각자의 돌덩이다. 딸린 식구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내가 바위를 이고 있는 것인지, 바위가 나를 엎은 것인지, 짊어진 어깨가 무거워진다.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 볕만큼이나 뜨거운 땀을 흘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아찔하다. 슬픔은 또 하나의 hüzün이 된다. 한(恨)의 노랫가락은 아잔(azān:기도할 때를 고하는 소리)으로 승화된다. 신과의 합일에 대한 소망과 구원의 확신이 이들을 지탱해주고 있었으리라.
건물을 쌓아올린 하나의 돌은 돌 이상의 돌이다. 돌 하나의 무게, 그것을 짊어져야 했을 백성들의 삶의 무게를 생각해 볼 때, 마음이 먹먹해 진다. 돌마바흐체를 짓느라 국고를 탕진하여 제국은 결국 쇠망했지만 그 덕분에 오늘날 터키공화국은 관광수입을 톡톡히 올리고 있다. 그러나 소수의 왕과 귀족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사용되다가, 대중에게 공개되었다는 것 뿐 자본의 논리에 의해 운영되고 관리되다가 여행을 즐길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선 옛날과 오늘이 다르지 않다. 희희낙락 웃으며, 하나같이 V하고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소비하는 관광객 역시 돈을 낸 그 순간만큼은 왕이 될 수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생애 가장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영원을 간직할 것처럼 찰나의 셔터를 눌렀다. 아름다운 건축물 뒤에 숨겨진 눈물과 노고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미래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것이 관광자원인지 옛 선조들의 정신인지에 대한 성찰 없이 우리세대는 지난 세월을 담보로 미래에 빚을 진채 현재를 만끽하고 있나보다.
돌마바흐체를 끝으로 우리의 여정은 끝이 났다. 고대도시 에베소에서부터 근대의 열망 돌마바흐체까지, 수 천 년 켜켜이 쌓인 역사의 지층을 타고 올라갔던 시간이었다. 시간은 저마다의 밀도가 달라, 빽빽한 시간도 있고, 느슨하게 흘러가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여기, 동과 서, 남과 북이 교차하는 터키 땅에선 느슨하게 흐를 시간이 없었다. 열흘 간 붉은 꽃은 없다지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꽃은 또다시 개화할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 이 땅의 주인은 달라진다. 달라진 주인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갖은 터키를 바라보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야 말로 공존의 시대를 여는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나도 이 사람들과 같은 마음가짐에 한술 숟가락을 얹어보련다. 아,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과연 우리세대가 미래까지 고이 전달해 줄 수 있을지….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가득 찬 정원, 돌마바흐체에 채우고 온 것은 나의 고민이며 여전히 비어있는 것은 반짝이는 지중해를 바라보며 느끼는 망양지탄이다.
국어국문과 1학년 권성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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