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제도적 변화의 일환으로 차별적인 언어사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국립국어원에 연인, 애인, 연애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개정하게 이끈 시민교육 활동 사례를 소개해 드립니다.
▶ 시민교육을 시작한 순간부터 현장 활동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어떤 현장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기대도 되고 막막했었다. 우리 조가 모인 것도 처음엔 그냥 우연이었다. 조를 짜다가 근처에 앉았던 사람들끼리 “혹시 같이 할 사람 있으세요?”라고 모여서 시작한 조였으니.
그리고 그렇게 모여서 주제를 토론하는데, 한참을 다섯이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끙끙댔다. 거의 삼 주 넘게 주제도 정하지 못하고 만나면 난상토론을 진행했다. 각자가 느꼈던 사회 문제들에 대한 얘기가 마구 나왔다. 독거노인, 북한,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기사를 찾아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활동을 짜다가 엎어지고. 한참을 얘기하다 삼 주 만에야 무엇이든 주제부터 잡아야겠다 싶어서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했던 모든 주제들을 뭉뚱그려 ‘사회적 소수자’라고 주제를 잡았다. 사실 학기가 끝난 후니까 고백하자면, 그 때쯤이 슬슬 현장 활동 계획서를 내야하는 시점이라 일단 주제부터 잡자고 급하게 결단을 내린 점도 없잖아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활동 계획을 짜는데, 이건 뭐 막막해도 너무 막막하고 광범위하기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주제를 구체화시키기로 했고, 토론 결과 사회적 소수자 중에서도 성소수자와 관련된 활동을 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주제가 정해지고 무슨 활동을 할 지 고민하는 건 주제를 정하는 일보다 어려웠다. 일단은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제도 모두 문제가 있다는 조원들의 문제의식에서 착안해 우리 조의 활동 목표는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제도적 변화’로 비교적 쉽게 정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수로 인식 변화와 제도적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점이 막막했었다. 일단 인식에 관련해서는 확실한 상황 진단을 위해 사람들의 인식부터 조사하자! 라는 생각에 성소수자와 일반인(무작위 표본) 인터뷰를 진행하고, 6월로 홍보되고 있었던 퀴어 축제에 참가해 그 곳에서 인식 조사를 하기로 했다. 제도에 관련해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혹은 그로 인한 차별)이 드러나는 법규나 미디어 자료들을 조사하기로 했다. 그런 조사활동 후에는 동영상을 제작하는 등 우리의 문제의식을 알리고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홍보 활동을 위주로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개선하는 과정에서 우리 조는 거의 ‘표류’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근데 설문지로 인식 조사를 하면 뭐가 소용이 있지?”
“그냥 우리끼리 얘기했던 내용에 데이터만 생기는 거야? 그럼 그게 무슨 소용이지?”
“제도 관련해서는 그냥 조사에서 끝날 가능성이 120%정도 되는 것 같은데······”
“애초에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제도적 변화라는 게 너무 막연하고 진부한 것 같아.”
조모임을 하며 이런 고민이 생겼고, 결국 처음에 잡았던 주제 자체에 대해 고민하게 되자 우리 조는 반 학기가 지나가는 무렵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던 중에 인식 조사를 위해 조원 한 명이 퀴어 축제를 보고 왔는데, 그 곳에서 ‘국제엠네스티 대학생네트워크’라는 단체가 하던 서명운동을 보고 우리 조의 방향성이 번뜩 떠올랐다. 단체에서 바꾸려고 하던 ‘가족, 결혼, 애인’ 세 단어를 보다보니 가족에 관련된 단어들 뿐 아니라, 사랑에 관련된 단어들 자체가 이성애중심적인 단어들로 정의되어 있었다. 우리가 조사했었던 제도- 법률에서도 ‘부녀자’라는 단어 때문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성폭력을 인정하지 않고 강체추행으로 판결한 일이 있었을 정도로, 별 것 아닌 것 같은 단어도 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결국 우리 조는 ‘언어의 정의가 차별을 심화시킬 수 있다. 언어의 정의가 바뀌어야 한다.’로 방향성을 수정하고, 현장 활동을 다시 계획했다.
우리 조의 활동은 언어의 문제점, 잘못된 정의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제대로 된 정의로 개정하는 데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첫 번째 활동은 우리에게 아이디어가 된 ‘국제앰네스티 대학생네트워크’의 서명운동에 연대하는 활동이었다. 우리가 현장 활동을 하는 것과 동시에 단체에 연대활동을 함으로써 단어의 정의가 바뀔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단체에 연락해서 오프라인 서명용지를 받고, 내용을 설명하는 피켓을 만드는 준비를 한 후 광화문과 시청 등지에서 서명 운동을 진행했다.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으며 서명 거부도 당하고, 비난의 말도 들으며 성소수자 관련 활동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인식을 체험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서명 운동을 진행한 것 이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밖에서 하루 받는 것으로는 많은 서명을 받을 수가 없어서 학교 내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짬짬이 서명을 받았고, 최종적으로 113명의 서명을 받아 단체에 등기우편으로 서명 용지를 보냈다.
연대 활동을 하며 우리는 우리 자체적인 활동 또한 계획했다. 우리 조는 ‘사랑’을 주제로 ‘애인, 연인, 연애’ 세 단어의 정의를 바꾸는 활동을 하기로 했는데, 국제엠네스티 대학생네트워크같은 단체와는 다르게 인원도 적고 기간 제한도 있었던 만큼 활동하는 데에 아무래도 제약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프라인 서명 대신 인터넷과 SNS를 활용해 단기간에도 큰 위력을 기대할 수 있는 온라인 서명을 받기로 하고, 다음 아고라 제안 페이지를 만들어 홍보했다. 조원들이 자주 가던 사이트에 홍보 글을 올리고, 페이스북에서도 서명을 홍보했다. 나중에는 카카오톡의 단체 카톡방마다 링크를 올려서 홍보시키기도 하는 등 짧은 기간에 최대한 많이 서명을 받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서명을 받는 중에는 성소수자 관련 활동을 하는 단체 네 곳에 우리의 활동을 알리고 지지를 부탁하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아쉽게도 우리 조는 오랫동안 활동을 고민하고 수정하다 현장 활동 자체가 늦어졌기에 기말고사를 대체하는 비전 발표 전에 활동이 마무리되지 못했다. 온라인 서명운동 기간이 종료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서명 페이지 캡쳐 등을 첨부해 국민신문고-비공개 제안으로 해당 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에 우리의 요구를 전달했다. 요구가 전달된 것 까지 포함해서 우리는 우리의 활동을 정리하는 피피티를 만들어 비전 발표를 마쳤고, 그렇게 우리의 1학기 시민교육 수업은 종강을 맞았다.
종강 후에 대표 번호로 적어둔 조장의 번호와 이메일로 가끔 연락이 왔다. 제안이 접수되었다는 문자와 이메일, 처리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제안에 대한 답변 글. 언제쯤 결과가 나올까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1월 20일. 우리의 제안이 접수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확인해보니 진짜 바뀌어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청원을 넣은 단어는 아니지만 우리가 문제의식을 가졌던 ‘사랑’ 이라는 단어도 수정되어 총 네 단어의 정의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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